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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정동영, 백의종군 왜 못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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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지난 연말에 만난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과 정동영 전 의장은 '노무현 뺀 신당'을 창당하기로 합의했다. "신당은 어느 누구의 영향권에서도 벗어나 자율.독립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말이 그 뜻인 줄 모르는 이 없다. 합의문 중 "남은 기간 참여정부의 국정운영을 성실히 뒷받침한다"는 대목은 변명용이며 '원칙 있는 국민의 신당'이란 대목은 위장용이다. 국정 실패에 공동 책임을 져야 할 전.현직 여당 의장이 대통령에게 몽땅 책임을 넘긴 채 새로 당을 만들려 하니 낯이 뜨겁기에 국민에게, 또 노 대통령에게 변명하는 것이다. 민주당을 깨고 열린우리당을 만든 지 불과 3년 만에 다시 당을 깨고 호남에 기대려니 명분이 없어서 '도로 민주당'이 아니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그래서 얕보였다. 노 대통령에게, 또 국민에게. 한 번 돌이켜 생각해 보라. 두 사람은 어쨌든 현 정권에서 여당 당의장을 하고, 장관을 지냈다. 본인들은 오히려 노 대통령을 도와줬다고 생각하겠지만, 또 노 대통령이 두 사람을 당에 놔두기 부담스러워 내각에 끌여들였을 수도 있지만, 국민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두 사람을 현 정권의 최대 수혜자이며 동업자로 여기는 것이다. 이런 경우 대체로 제3자의 시각이 옳을 때가 많다.

그래서 두 사람은 노 대통령의 조소거리가 됐다. 두 사람의 장관 기용에 대해 노 대통령은 "링컨 (포용 인사) 흉내 좀 내봤는데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었다"고 쏴댔다. 노 대통령은 지금 "당신들은 죽기살기로 덤빌 용기도, 가진 것 다 포기하고 헌신할 희생정신도 없지 않으냐"며 비아냥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당을 지킬 테니 어디 당신들이 두 번씩 탈당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비웃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자신을 비워야 했다. 하다못해 그런 시늉이라도 했어야 했다. 노 대통령과의 결별이 불가피하다면, 지금의 열린우리당으로는 대선을 치를 수 없다면 말이다. 노 대통령은 국정 실패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군가 그 짐을 떠맡아야 한다. 그래야 최소한의 설득력이라도 있다. 4년간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대선을 눈앞에 두게 되니 "나는 이 인기 없는 정권과는 상관없소"라며 발을 빼는 형국이다.

두 사람이 만나 기껏 '노 대통령 배제'에 합의할 게 아니었다. "노 대통령과 우리의 공동 책임"이라고 말로만 반성하는 것도 아무 진정성이 없다. "우리는 그 책임을 지고 백의종군하겠다"고 했어야 했다. 보수세력의 집권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면, 진보세력이 풍비박산 나지 않도록 하려면 말이다.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여당의 대선 후보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백의종군 선언은 자신들의 주장에 진실성을 부여한다. 그랬다면 두 사람이 합의한 '평화개혁세력과 미래세력의 대통합'이, 설령 그것이 '반(反) 한나라당 전선 재구축' 또는 '영남 포위 전략'을 그럴듯한 말로 포장한 것에 불과할지라도, 훨씬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국민의 마음은 지금 돌덩이처럼 굳어 있다. 웬만한 선동이나 이합집산을 통한 눈속임, '오픈 프라이머리' 같은 이미지 전략에는 끄떡도 하지 않을 정도다. 이런 국민의 마음을 녹이려면 용광로 같은 뜨거운 열정과 자기 희생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고건 전 총리,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같은 외부 인사들이 동참할 수 있다. 그런 각오가 없다면 두 사람은 앞으로도 노 대통령의 조롱을 피하기 어렵다. 12월 대선은 물론 내년 4월 총선도 기대할 수 없다. 그 결과는 진보의 붕괴, 한국 정당 정치의 붕괴로 이어질지 모른다.

김두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