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31)|<제85화>나의 친구 김영주(16)-빗나간 탈출계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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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내가 당장 해야할 일은 오카모토 대장 방에 걸려있는 「신병교육일정표 에서 야간훈련이 어느날 있는지 알아내는 일이었다. 그래야 인민해방군에 있는 동지들이 우리의 탈출을 인도하고 엄호하는 계획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나는 그것을 아주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나는 하루빨리 천바이랑에게 그 날짜를 알려야했다. 그래서 이발하는 날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야말로 일일여삼추. 그러나 천바이랑은 다음 이발날에도 그 다음 이발날에도, 심지 아 야간훈련이 다 지났는데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부대에는 어느새 다른 이발사가 출입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찌 되었을까」. 새로 온 이발사에게 물어보았으나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하느님, 나는 어쩌란 말입니까」.
그러던 어느 날 설상가상으로 고약하기로 이름난 백마가 뒷발질로 「진천송 이등병」을 완전히 KO시켜버린 사고가 발생했다. 진천송은 곧 의무실로 옮겨졌고 여러 병사들이 그를 둘러쌌다.
그는 혼수상태에 빠져있으면서도 혼잣말로 「이용상, 이용상, 내가 병원에 입원하더라도 나를 버리고 떠나서는 안돼. 탈출할 때는 나를 업고서라도 꼭 데리고 가줘」하는 것이었다.
『야 진천송, 아무리 조선말이라도 그런 말해선 안돼. 알겠는가.』 나는 기겁을 하며 그를 쥐어박았다.
『이 이등병, 지금 진천송이 뭐라고 했나. 지금 그거 조선말이지. 뭐라고 했어.』옆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구토병장이 말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아니라고. 이 조선놈들 바로 댈테냐, 맛좀 볼테냐.』 소매를 걷어올리는 구토에게 나는 말했다.
『백마에 원수를 갚아달라고 했습니다.』
『응,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 이 이등병, 나를 따라와. 내가 원수를 갚게 해 줄 테니.』
마굿간으로 나를 데리고 간 그는 백마에 올라타라고 명령했다. 그는 내가 말에 올라타자마자 회초리로 백마의 궁둥이를 후려쳤다. 안장도 없는 나마에 올라탔던 나는 연병장을 한 바퀴 돌기도 전에 백마등에서 「붕」하고 떠올라 땅위에 뻗어버렸다. 나는 진천송과 나란히 의무실에 눕게됐는데 조선인 병사들이 걱정을 하면서 모여들었다.
『이군, 우리들은 자네만 믿고있네. 빨리 회복해 탈출해야지, 부탁이네.』
『너희들 마음은 잘 알고있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우리는 결코 일본군대가 고생스러워 탈출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보다 몸이 약한 일본인들도 해내는데 우리들이 못할 리가 있겠는가. 우리들은 다만 조선독립이라는 신성한 의무 때문에 목숨을 걸고 탈출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말 알겠지.』
『그럼 알고 말고. 뭐든지 네가 하자는 대로 따를 테니 제발 혼자서는 탈출하지 말아 줘.』
『바보 같은 소리하지도 마라. 나 혼자라면 벌써 떠났다.』
진천송과 나는 5일 후에 다시 일어났다.
살을 에일듯이 추운 날이었다. 초년병 「전원집합」을 명령한 교관이 소리를 높이면서 말했다. 『너희들은 아직 초년병교육이 안 끝났지만 정세에 따라서는 명령일하 언제 실전에 참가할지도 모른다. 그런고로 오늘은 실전에 대비하고자 살아있는 표적을 찌르는 교육을 실시한다. 알았는가.』 살아있는 표적에 돌격한다니, 살아있는 사람을 죽일 모양이다. 교관은 우리들을 비행장 벌판으로 데리고 갔다.
벌판에는 이미 나무기둥이 세워져있었고 거기에 사람하나가 묶여있었는데 가까이 갈수록 묶여있는 사람의 윤곽이 뚜렷이 드러났다. 그 순간 나는 「앗」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묶여있는 사람은 그간 내가 찾고 또 찾던 이발사 천바이랑이 아닌가.
『….』
나는 아득히 이성을 잃어갔다. 내가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전혀 분간치 못할 정도로 얼이 빠져가고 있었다. 【이용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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