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 김석환특파원 현지취재/흔들리는 소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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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대중인기 옐친 엇갈린 평가/신뢰할 수 없는 독선적인 인물/고르비에 맞설 유일한 지도자
걸프전쟁이 끝난후 3월초 제임스 베이커 미국국무장관이 전후처리등을 협의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때의 일이다.
베이커장관은 소련의 15개 공화국 지도자들을 만찬에 초대했다. 이중 최대 영토와 인구를 가진 러시아공화국의 최고회의 의장 보리스 옐친은 이를 거부했다. 대신 그는 모스크바에 자리잡고 있는 의장공관으로 베이커를 초청했다. 결국 두 사람은 미 대사관저에서 잠시 환담하고 헤어졌다.
비슷한 때에 옐친은 개혁파 「민주전선」집회에서 이들에게 정당결성을 촉구하면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에 대한 「선전포고」를 종용했다. 후에 그는 『연설문안을 읽기만 했더라면 실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후회했다. 그의 아집과 경망을 드러내는 단면이다.
소련의 정치·경제상황이 악화되면서 발트해공화국의 분리움직임에 대해 유혈진압을 택하는등 잇단 강경책으로 고르바초프 신망이 떨어지면서 소 지식인들조차도 옐친에 거는 기대가 커지고 세계의 관심도 그에게 더욱 쏠리고 있다.
옐친에 대한 인기와 기대는 그만이 고르바초프에 대항하고 고르바초를 대체할 수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옐친의 행태가 보여주는 것처럼 소련에서 만나본 정치분석가·기자·교수·정치인들의 생각은 이런 인식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았다. 보수파로부터 격렬한 반감을 사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지식인 사이에도 상당한 거부감이 존재했다.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지의 정치담당 알렉산드로 바실리예프기자는 『옐친의 인기가 일반 대중사이에서 높은 것은 그가 고르바초프의 반대쪽에 서 있기 때문일뿐』이라고 혹평했다. 고르바초프가 집권하고 있을 경우에는 그의 인기가 유지되지만 고르바초프가 떠나고나면 옐친은 「위험한 인물」이라는 평가다.
또한 옐친이 아직 공산당내에 있을때 그와 함께 지방당간부 교육등을 받아 그를 잘 알고 있다는 렘비트 아누스 에스토니아 공산당 제1서기는 『옐친을 신뢰할 수 없다. 그는 합의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한다』고 말했다.
반면 옐친의 지지자들은 『현재 옐친만이 러시아 민중의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으며 신뢰를 상실하지 않은 유일한 지도자』라고 강조했다. 옐친의 경제참모인 파벨 보샤노프는 『우리가 제시했던 5백일 경제개혁안과 연방정부가 제시했던 3단계 경제개혁안을 놓고 비교해보자. 두 안의 본질적인 차이는 우리 경제의 장애요인을 어떤 식으로 제거해나갈 것인가에 있다.
5백일안은 총체적인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개혁을 급속히 추진함으로써,경제의 암적인 존재들을 제거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면 3단계 개혁안은 이행기간도 10∼15년이상 장기간으로 잡아놓은데다 암적인 존재인 국가계획기관등의 존재여부에 대해 다분히 추상적인 언급만을 해놓고 있다』고 말했다.
옐친에 대한 이와같은 상반된 평가는 소연련방의 존속을 묻는 지난 17일의 국민투표 결과가 잘 말해준다.
당시의 투표에서 러시아민중들은 77%의 지지자투표율로 고르바초프의 제안을 수용하는 한편 80%의 지지투표율로 옐친이 제안한 러시아공화국대통령직선에 찬성했다.
모스크바의 정치분석가들은 이와같은 결과는 『고르바초프는 밉지만 연방이 와해되는 것은 싫다』는 일반민중들의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라고 분석했다.
28일 (모스크바시간)예정된 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에서 다수의석을 장악한 보수파에 의해 옐친에 대한 불신임 결의가 만약 통과된다면 그는 러시아민중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법을 택할 것이며 이번 국민투표결과 80%이상이 지지한 직선제대통령에 출마,다시 고르바초프에 대항하려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옐친은 고르바초프의 사임을 요구하고 있고 고르바초프는 옐친축출파를 지지하고 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는 휘청거리고 있고 옐친은 개방과 시장경제를 표방하지만 숱한 허점을 드러내고 있다. 소련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은 쉽사리 해결될 전망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28일의 러시아공최고회의에서 빚어질 양자대결이 이런 상황에 어떤 결과로 영향을 미칠지 긴장감이 돌고 있다.<모스크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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