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산문집 낸 시인 이문재 … 게으름을 예찬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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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책을 받아보고 두 번 놀랐다. 시인 이문재(47)의 산문집 제목은 '이문재 산문집'(호미)이었다.

19세기 프랑스 시인 말라르메가 상징주의 시학을 시로 풀어낸 '시집(Poesie)'이란 시집을 발표했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한국문학에선 전집이나 선집 류를 빼고는 아마도 처음인 듯싶었다. 그래도 말라르메에겐 전략적인 필요가 있었다. 새로운 시학을 설파하기 위해선 도발적인 포즈가 필요했을 터였다. 그러나 한국의 시인은 끝내 속셈을 밝히지 않았다.

이 책이 시인의 첫 산문집이란 사실도 의외였다. 시인은 문단이 인정하는 미문가(美文家)다. 산문 좋기로 소문났고, 하여 여느 시인보다 산문도 많이 쓰는 편이다. 각종 매체에 기고나 연재한 글, 여러 단행본의 해설 등에서 시인의 이름은 자주 띄었다. 한데 2003년 나온 시인 탐방집 '내가 만난 시와 시인'을 빼고는, 이 산문집이 유일하단다. 시력(詩歷) 25년 만에 처음 나온 산문집이란다. 그러나 수많은 산문을 여태 책으로 묶지 않았던 이유 또한 시인은 알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영 짐작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시인은 아주 느린 사람이다. 스스로 고백하듯이, 시인은 '사람이나 삶, 사건이나 사고, 어떤 상황이나 국면을 한꺼번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말투는 또 얼마나 느릿한가). 그래서인지 책은 고스란히 게으름을 찬양하는데 바쳐진다. 시인은 자신이 얼마나 게으른 사람이며, 게으름이 얼마나 좋은 것이며, 다소 부족하고 불편한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따위를, 부지런히 늘어놓는다.

그렇다 보니 제목 따위는 필요 없었을 것이다. '반인간적인 문명의 급소를 건드리는' 글 무더기를 그럴싸한 비유나 수사로 포장하는 건, 시인에게 에어컨 바람을 맞는 것만큼이나 비위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안타까운 건, 일상에서 만나는 이문재란 시인은 누구보다 바쁘단 사실이다. 일찍이 '게으른 사람은 아름답다'란 시를 쓴 시인이지만, 늘 쫓기고 허둥대며 산다. 게으름을 찬양하는 시인 만큼은, 한껏 게으름 펼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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