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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적 사고' 필요한 노동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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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한비자에 나오는 얘기다. 사람의 얼굴을 조각할 때 처음에는 눈은 작게 하고 코는 크게 하라고 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조각한다고 눈을 크게 조각하거나 코를 작게 조각해 놓으면, 나중에 눈을 작게 고치고 싶어도 고칠 수 없고 코를 크게 키우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비자는 여지를 남기는 사고방식, 곧 단계적인 사고방식을 강조하고 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완벽한 형태로 얻겠다는 생각보다는 현실 제반 조건을 고려하며 목표를 순차로 완성해 나가는 점진적 자세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잔이 비어 있어야 새로운 좋은 것을 담을 수 있다는 노자의 말과도 통한다.

단계적 사고는 유연하며 타협도 마다하지 않는다. 현실과 순응하며 점진적으로 문제를 풀어나가기 때문에 갈등과 마찰도 적다. 시행착오에서 오는 손실도 줄일 수 있다. 반면 모든 것을 일거에 해내겠다는 급진적 사고방식에는 자기만이 옳다는 독선적 사고가 깔려 있다.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가져가려고 한다. 전부 아니면 전무의 사고로 빠지기 쉽다.

노동행정을 맡으면서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단계적 사고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최근 통과된 비정규직 보호법도 그렇다. 이 법은 차별대우와 고용불안의 이중고를 안고 있는 비정규직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적 장치다. 비정규직 보호라는 입장에서만 보면 이 법은 미흡한 부분이 있다. 사용자인 기업 입장도 고려해 절충적인 조화를 도모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고용 안정과 함께 노동시장 유연성도 고려한 것이다. 그러자 노동계 일부에선 완벽한 수준의 법을 요구하며 총파업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준에서 본 완벽한 법일 뿐이다. 일단 시행해 보고 문제점이 드러나면 고치자고 설득해도 막무가내다.

지금도 해결 기미를 찾지 못한 고속철도(KTX) 여승무원 문제도 그렇다. 여승무원들은 처음 철도유통공사의 1년 계약직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자신들의 고용 형태가 불법파견에 해당되고, 불법파견의 경우 파견자를 직접 사용하는 사업자에게 고용의무가 있으므로 철도공사가 자신들을 고용해야 한다며 파업에 돌입했다. 철도공사는 우선 철도유통의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해 줄 테니 업무에 복귀하라면서, 철도공사로 옮기는 문제는 시간을 갖고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철도공사의 양보안은 서로가 윈윈할 수 있는 제안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승무원들은 철도공사에서 당장 근무해야 한다며 제의를 거절하고 파업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사회는 다양한 이해 집단의 결합체다. 그리고 서로의 이해를 대화와 타협을 통해 조정하며 사회적 통합성을 유지해 간다. 통합의 마지막 장이 국회다. 따라서 국회에서 통과된 법은 사회적 타협의 산물로 존중돼야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 원리다. 자신들의 주장 전부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회입법을 전면 거부하는 것은 민주주의적 태도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상대주의와 관용의 정신에 기초한다. 소박하게 표현하면 그 정신은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단계적 사고다.

이상수 노동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