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왕과 사담(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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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먼 옛날 장수왕이 있었다. 왕은 자비와 정의로 나라를 다스렸으므로 백성들은 태평성세를 누렸다. 이웃 나라에 있던 포악한 어떤 왕은 장수왕의 번영을 시샘하여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 왔다. 신하들은 이에 맞서 싸우기를 원했다. 그러나 장수왕은 이렇게 말했다.
『싸움에서 만약 우리가 이기면 그들이 죽을 것이고,그들이 이기면 우리의 희생이 클 것이다. 저쪽 군사나 이쪽 군사나 다 소중한 목숨들이 아니냐. 누구나 제 몸을 소중히 여기고 목숨을 아까워 하는데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것은 어진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왕은 이같이 신하들을 말린 뒤 『나는 차라리 이 나라를 내주어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리라』하면서 산속으로 숨어 버렸다. 불교의 육도집경에 나오는 얘기다.
국가의 주권이나 독립이라는 정치적 시각에서는 물론 말도 안되는 논리다. 그러나 생명을 중시하고 자비를 최고의 가치로 신봉하는 신앙적 측면에서는 지고의 선택이라 할 것이다.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쿠웨이트를 합병함으로써 이라크를 아랍최강국으로 만들어 외세를 몰아내고 이스라엘로부터 팔레스타인땅을 되찾겠다는 야망으로 침략을 감행했다. 그리하여 그가 아랍을 단결시킨 영웅으로 추앙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유엔은 이를 명백한 침략으로 단정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은 탈환작전을 전개했다.
사담의 의도와는 반대로 아랍권은 오히려 분열됐고,쿠웨이트는 사상 유례없는 폭격과 포화로 해서 초토화됐다. 교전피아간에 희생된 인명은 또 얼마나 많은가.
궁지에 몰린 사담은 입으로는 결사항전을 부르짖으면서도 철군협상안을 제시했으나 미국은 완전투항이나 다름없는 무조건 철군을 요구했다. 사담의 정치적 운명과 이라크의 국가적 존립마저도 전망이 불투명하다.
장수왕과 사담이 만난다는 가상의 시나리오­. 왕이 묻기를 『그대는 그래서 무엇을 성취했는가.』
사담 답왈 『알라신의 길을 위해 사악과 싸웠노라.』 사자들은 신의 품에서 영락을 누리겠지만 지상에 남은 것은 폐허와 죽음,슬픔과 고통뿐이다.
장수왕은 산속에서 숨어 살다가,굶어 죽어가는 걸인에게 자기 목숨에 걸린 현상금을 타게 함으로써 국민에 대한 마지막 봉사를 한다. 지금 사담이 이라크 국민에게 해줄 봉사는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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