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령연금제? 돈은 땅파면 나오나

중앙일보

입력

이런 부모의 심정을 생각해보자. 애지중지 키워놓은 아들이 하나 있다. 그런데 세상을 잘못 만났는지 자식의 일자리가 변변치 않다. 열심히 살아보려 발버둥치고 있지만 비정규직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전전한다. 천정부지로 치솟은 아파트 값을 보면서 내집 마련의 꿈은 접은지 오래다. 그의 어깨는 처져있고 미래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아들의 효심이 극진하다. 힘든 생활형편에도 부모님 쓰시라고 용돈을 보내온다. 그래도 부모는 벌어놓은 재산이 좀 있어 그럭저럭 살아가는데 큰 불편은 없건만... 부모들은 고민 끝에 용돈을 돌려보낸다.

대한민국을 가정에 비유했을 때 엇비슷한 일이 진행되고 있다. 기초 노령연금제란 게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흘러가는 모양은 사뭇 다르다.

기초 노령연금제는 대한민국의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국가가 매월 일정액의 연금을 주는 복지제도로, 2008년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한나라당은 모든 노인에게 월 15만원 정도씩 일괄 지급하자고 하고, 열린우리당은 소득 하위 60% 노인들에게 월 9만원 정도씩 지급하자고 한다. 지급액은 소득수준 향상과 물가 상승에 따라 계속 올라가 2030년이 되면 30만원 정도로 높아질 예정이다.

일단 열린우리당의 안이 7일 국회 법사위를 통과해 본회의 의결을 앞두고 있다. 한나라당이 열린우리당 안이 미흡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연금액이 다소 올라갈 가능성도 있다.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의 효심이 극진하다 아니할 수 없다. 소득 하위 60%라면 어지간한 중산층 노인들도 혜택을 보게되니 말이다. 시행 첫해에 약 300만명이 연금을 받게 되고, 2020년에 470만명, 20030년에는 710만명이 혜택을 누리게 된다.

문제는 돈이다. 노령연금의 재원은 중앙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에서 나온다. 당장 2008년에 3조원이 필요하고, 2020년이면 9조원, 2030년이면 24조원이 든다.

나라 살림이 넉넉하다면이야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 나라의 빚은 계속 불어나고 있다. 내년이면 국가 부채가 300조원을 돌파할 전망이다. 노무현 정부 들어 단숨에 2배로 커졌다.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저출산 고령화로 세금 낼 경제활동인구는 자꾸 줄어드는 대신 국가가 보살펴야할 노령인구는 급속히 늘어나게 된다. 노령연금제가 아니라도 노인들을 위해 쓸 예산은 늘어날 수 밖에 없다.

노령 연금제는 젊은이들에게 변변한 일자리 하나 만들어주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른 대접을 받겠다며 자식들에게 손 벌리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의 자식들은 노인 봉양하는데 허리가 휘고,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국가 부채에 속수무책으로 깔려 허덕일게 뻔하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상상력과 창의력을 펼치며 외국의 경쟁자들과 싸워 이겨 국부를 키울 수 있을까.

이해하기 힘든 것은 이번 노령 연금제 구상이 국민연금 개혁안과 맞물려 나왔다는 것이다. 국민연금 개혁안은 한마디로 '더 내고 덜 받도록' 고안된 것이다. 맞는 방향이다. 그렇게 해야 우리의 후세가 부담을 덜게 된다. 하지만 후세 개개인의 입장에선 기성세대에 비해 연금의 혜택을 덜 누릴 수 밖에 없게 된다. 지금 기성세대는 후세를 위해 국민연금을 개혁하겠다면서, 다른 한구석으로 자기들 잇속을 챙기는 확실한 제도를 새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사실 한달 9만원이면 용돈 수준이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하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수백만명에게 돌아가며 쌓이면 일순간 수조원대의 돈이 된다. 물론 벌어놓은 재산과 소득이 없어 힘겹게 노년을 보내고 있는 노인들이 적지않다. 자식들이 버려두고간 손주들을 보살피며 눈물겹게 살아가는 노인들도 많다. 이들은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도와줘야 한다. 하지만 소득 하위 60%는 폭이 너무 넓다. 20% 정도에게 보다 확실한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게 낫다.

기초 노령연금제가 국회 본회의 통과를 눈앞에 두고 있지만, 반대의 목소리는 좀처럼 듣기 힘들다. 열린우리당의 복지정책을 혹독하게 비판했던 한나라당은 노령연금제에 대해서 만큼은 돈을 더 써야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노인들의 표는 당연히 한나라당 몫이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모양이다.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단체들도 이 문제에 관한한 한나라당이 잘한다고 칭찬한다. 소외 계층을 위한 정책에서 모처럼 모범을 보였다는 이유에서다.

기초 노령연금제는 분명 시기상조이고, 시대에 역행하는 이기주의적 정책이다. 국민연금에 이어 공무원연금과 군인연금 등을 확실히 개혁해 후세에 부담을 주지않는 구조로 만들어 놓는 게 선결과제다. 노령연금제는 그런 뒤에 논의하는 게 타당하다.

스웨덴 같은 선진 복지국가들도 최근 이 제도를 폐지하거나 축소하는 논의를 활발히 벌이고 있다고 한다.우리의 자식 세대가 노령연금제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지금의 우리 세대를 과연 어떻게 평가할까? 두려운 마음으로 엄정히 따져봐야 한다.

나라 예산은 공돈이 아니다. 땅을 파면 나오는 게 아니다. 흥청망청 써버려 나라 곳간을 비우고, 그것도 모자라 빚을 쌓으면 우리 자식들은 그 만큼 고달퍼진다. 이 정도로 경제의 활력을 빼놓고, 부동산값을 올려 재미를 봤으면 됐지, 자식들 미래의 싹 마저 짖밟으려 하는가?

영국의 수상이었던 W.E 글래드스톤(1864-1874년 재직)은 국가 예산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고 한다.

"예산은 단순한 산술적 계수가 아니다. 실로 국가와 사회, 개인의 번영에 영향을 미치는 근대 민주정치의 필수불가결한 메카니즘이다. 예산은 정책에 의거한다. 예산이 국가의 정당한 요구를 반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금전적 낭비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더 나아가 도덕적인 죄악이다"라고.

김광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