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의 선발 비리 한심한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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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1922년 우리나라에 최초로 정형외과학을 도입한 의학계의 선구자이며 세브란스의대 학장과 YMCA이사장·국회의원(2대)·흥사단 이사장 등 화려한 경력을 지닌 여천 이용설 박사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그의 나이 올해로 96세, 청일전쟁이 나던 해인 1895년 평북 희천에서 출생한 그는 망백을 넘긴지도 5년이 지났다.
의사로서, 독립투사로서, 그리고 사회운동가로서 그가 펼쳐왔던 다양한 인생역정을 굳이 들춰보지 않더라도 19세기말에 태어나 20세기를 거쳐 이제 21세기를 바라보고 있는 그 자신이야말로 살아있는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 상아 아파트 자택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한복차림으로 응접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열두살때 네살 위인 부인과 결혼, 20여년전 사별한 후 지금의 이재숙여사(60)와 단둘이 25평 남짓한 아파트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고 이박사의 좁은 응접실은 손자·증손자들의 사진과 함께 도산 안창호 선생의 사진, 월남 이상재 선생의 친필 액자 등으로 꽉 차 있었다.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오년째 남대문교회 장로직을 맡고 있는 그는 평생동안 술과 담배를 멀리하며 살아온 철저한 금욕주의자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술이나 담배같은 것에 잠시 취해서 그것을 즐기다 보면 결국 육신을 망치게 되지요. 돈이나 권력도 마찬가집니다』
건강의 비결을 묻는 상투적인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은 엄숙하기 조차했다.
결국 성경의 말씀대로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곧 죽음을 낳는다』는 것이다.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던 해인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일경의 끊임없는 감시와 추적을 피해 중국배경으로 망명한 그는 북경협화 대학부속 병원에서 2년간 의사로 근무하던 중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나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서게 됐다.
『북경에 있는 동안 나는 고국에서 고생하는 동지들에게 항상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도산선생을 만난 자리에서 나의 이같은 심경을 털어놓았더니 크게 꾸짖으면서 하시는 말씀이 「총칼 들고 싸우는 것만이 애국인줄 아느냐. 우리가 독립이 되면 정치가도 필요하고 의사도 필요하다. 자기가 맡은 직분에 최선을 다해 그 분야의 1인자가 되면 그것이 곧 애국하는 길이야」라고 하시더군요.』
도산과의 만남은 그의 일생을 좌우할만큼 거대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 같았다.
자기 스스로를 낮추고 몸소 실천 궁행하면서 조직을위해 헌신하려는 도산의 「무실력행」이야말로 지금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가장 절실한 자세가 아니겠느냐며 아쉬워했다.
여천은 요즘 큰 물의를 빚고 있는 예체능계 대입부정과 의대의 인턴·레지던트 선발 비리에 대해 『대학의 양심이 왜 이지경이 되었는지 한탄스러울 뿐』이라도 상아탑을 지키고자하는 「교수들의 양심회복」을 강력히 촉구했다.
『우리나라 지도자들이 도산 선생과 같았더라면 우리가 훨씬 행복한 시대를 살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승만 박사는 워낙 자기중심적이고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지요. 도산선생과 비교하면 결코 지도자감이 못되는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나라의 지도자들 가운데 늘 계략적이고 당파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인물들이 당대를 지배해 온 불행한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며 의미있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세브란스의전 교수로 있을 당시인 36년 그가 돌연 사표를 던지고 잠시 유럽으로 훌쩍 떠나버린 사건도 부정과 타협하지 못하는 그의 강직성을 잘 대변해주는 대목이다.
병원 간부가 총독부의 압력에 못 이겨 부정입학을 시켰는데 엉뚱하게도 이 사실을 폭로한 양심적인 교수가 교단을 떠나게된 사건을 보고 『신성한 학교에서조차 양심이 통하지 않는다면 더이상 일하고 싶지 않다』며 사표를 던졌다.
그는 평소 정치엔 별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50년 당시 인천갑구에서 무소속으로 민의원에 당선된 것이 자신으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 외도였다고 술회했다.
「여천」이라는 아호는 그가 북경에 망명해 있을 당시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중국인인양 가명으로 썼던 것이 그만 호가 돼버렸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미국 노스웨스턴대 의과대학에서 외과학을 연구했던 이박사는 26년 귀국과 동시에 세브란스의전 교수가 되었다.
그 무렵 서울에서는 『경성의전은 백린제(백병원 설립자) 세브란스에는 이용설』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당대를 풍미했던 명외과의였다.
1936년 이교수는 수양동우회 사건(일명1백5인사건)으로 기소됐다.
당시 도산이 창설한 흥사단 단원들은 「수양동우회」란 이름아래 모임을 갖고 있었다.
도산을 비롯, 장리욱박사·김윤경 박사 등 2백여명이 입건되고 1백5명이 체포됐는데 죄목인즉은 수양동우회가 전국적으로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군대를 양성할 목적으로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었다.
2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집행유예로 풀려난 그는 교수직을 사임하고 서울 견지동에 정형외과를 개업했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환자들이 외과환자로 자신이 집도한 전신마취 수술만 해도 5천건이 넘는다고 회고했다.
『미국서 배운 새 기술로 결핵성 관절염으로 지체 장애자가 된 한 학생을 고쳐주어 장안에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미국유학 경력을 가진 그는 조선의사회의 추천으로 미군정하에서 보건후생부장(지금의 보사부장관격)이란 중책을 맡기도 했다.
정부수립과 함께 이박사는 다시 세브란스의대 학장에 취임했다.
그러면서 그는 삼동소년촌·동명학원 등 고아들을 위한 봉사활동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
50년 부산에서의 피난국회시절 발췌 개헌때는 관의 유혹을 뿌리치고 신익희·곽상훈씨 등과 함께 반대파에 합세, 결국 「국제공산프락치사건」이란 엄청난 모략에 걸라 갖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슬하에 1남4녀를 두고있는 이박사는 올해 81세된 맏딸로부터 요즘도 거의 매일 안부전화를 받고 있다.
외아들인 근영씨와 사위둘이 모두 미국에서 의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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