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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밀착된 「민간경제 실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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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국회의원 뇌물외유 사건으로 무역 특계자금이 여론의 도마위에 오르면서 새삼 이를 요리해온 무역협회, 그리고 그 「장」자리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무역협회 회장은 어떤 자리이며 무슨일을 맡고 있는가.
한마디로 무역협회 회장은 웬만한 경제부처 장관보다 센 자리라 할수 있다.
무역협회 회장직이 직접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경제계 전체에 미치는 입김은 정책 집행자를 오히려 능가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이는 총리와 부총리를 역임한 경제 관료계의 거물들이 줄줄이 회장직을 맡으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일종의 룰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경제각료 출신들이 회장을 맡다보니 무역협회 회장은 「민간」의 옷을 입은 실질적인 정부정책의 수행자란 소리를 자주 듣는다.
대내외적으로 정부가 나서기 껄끄러운 일을 민간이란 「명함」을 내밀며 해결에 앞장서 온 무협회장의 관행 때문이다.

< 대통령이 실질임명 >
물론 「수출우선」이라는 국가적 대명제와 민간의 이해가 일치할 때 그같은 무역협회의 위상은 효율적일 수 있겠지만 정부와 민간의 이해가 맞지 않을때는 끝없는 소문들이 난무하는 점도 사실이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특계자금이 그 대표적인 예다.
특히 무역협회 회장은 총회의 의결에 의해 선출된다는 형식에도 불구하고 최고외층의 정시에 의해 결정된다.
물론 46년 설립당시 김도연 초대회장에서부터 임문환·최정주·강성태·이활 회장에 이르는 초기 20여년간은 회장인선에 무역업계의 의사가 1백% 반영됐지만 우리의 무역규모가 커지고 특계자금이란 것이 생기고부터는 비공식적으로 대통령의 인사사항이 되어버렸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경제각료 출신들이 등용했고 무역협회회장은 부총리나 총리자리 앞뒤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게됐다.
무역협회 창립 이후 45년간 회장직을 맡았던 사람은 모두 10명이다.
그러나 10명 모두가 무역협회를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중에서 무협 초창기의 이활 회장, 중홍기의 박충훈 회장, 그리고 현재의 남덕우 회장이 무역협회의 역사를 실질적으로 대변한다.
이들 3명이 무협회장을 맡은 기간은 모두 32년.
나머지 7명은 모두 합쳐 재임기간이 년으로 평균 2년이채 못되는 기간동안 회장직을 스쳐갔다.
이들 3인은 무역협회의 역사 자체를 크게 세토막으로 구별짓게 한다.
이회장이 무협의 태동·착근을 담당했다면 박회장은 무협의 비약적 성장을 대표하고 남회장은 그동안 획득한 무협의 기득권을 유지 발전시켜왔다.
특히 박회장 시절은 무협이 정치권의 영향권내로 들어가기 시작한 시기였으며 본격적으로 각료 출신들의 위협입성이 시작되는 출발점이었다.
우리나라의 수출규모가 연간 4천7백만원, 수입이 1억6천8백만원 하던 지난 46년, 무협설립 당시의 협회장은 속된말로 별것 아닌 자리였다.
해방이 되자 대일밀무역이 성행하는데다 미군정이 무역을 할만한 행정력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당시 정계유력 인사였던 김도연박사(초대회장)와 런던대학 경제과 출신 이활씨가 중심이 돼 미군정 상무부장 오정수씨의 도움을 받아 간판을 단게 무역협회였다.
김도연 회장밑에서 상무를 맡아 실무를 담당했던 이활씨는 당시 미도파 백화점 옥상에 사무실을 차리고 무협을 이끌어나갔다.

< 46년 미군정때 창립 >
김초대회장에 이어 49년 5월 회장직을 이어받은 이 회장은 자유당정권의 관계진출 제의를 뿌리치는 등 정권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고위층의 미움을 사 4대회장의 임기를 1년여 남긴채 회장직을 사임했다.
이후 무협회장은 임문환·최순주·강성태씨에 의해 이끌어지다가 4·19직후 다시 이활씨가 회장직을 맡게됐다.
해방직후 임법위원을 지내기도 한 이회장은 5.16 이후 공화당의 정견에 찬동, 무역협회회장을 하면서 최고회의 경제분과 위원을 거쳐 63년에는 국회에 진출했다.
이회장은 5·19 주체세력들을 설득해 수출만이 우리의 살길이라는 의식을 심어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지금의 무협회장이 정치권의 외풍을 받는 입장이라면 이회장은 오히려 정치권에 바람을 일으켰던 사람이다.
그가 무협회장에 재취임한 이후 국회의원(6대)을 하면서도 12년간 줄곧 회장을 할수 있었던 것도 박정희 정권이 그의 수출 지상주의논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정치인이기도 했던 이회장은 그보다 앞서 철저한 무역인이었기에 정치권의 입김을 막아내는 병풍의 역할을 했고 회현동 무역센터를 착공했다.
그는 17년이라는 회장 재임기간 중 한번도 보수를 방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이회장 시절부터 시작된 무협과 정치권의 접목은 청년 4월 상공장관과 기획원 장관을 지낸 박충훈씨(당시 행정개혁위원장)가 이회장의 뒤를 이으면서 보다 두드러지게 됐다.
박회장의 임명자체가 박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당시 국무총리실(김종필 총리시절)이 무협에 압력을 넣어 이루어지게 됐다는 박회장 자신의 설명이다.
정작 박회장 본인에게는 그 어느 누구도 사전 상의가 없었다고 한다.
경제 각료출신이 무협회강을 맡게되자 무역협회는 박대통령의 「수출입국」논을 업고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무협회장은 경제단체장들 중에서 막강한 발언권을 행사했고 더욱이 박회장은 정부정책에까지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처럼 무협이 커질수 있게된 결정적 원동력을 제공한것은 박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수출진흥 확대회의였다.

< 정부서 주문 많아 >
박회장이 상공 장관시절 건의해 만들어진 이 회의는 그 성격이 「어전회의」라는 점에서 수출에 관계되는 모든 애로가 단숨에 제거되는 현장이었다.
부처간의 이견이 있을때도 수출을 진흥하는 길이라면 그목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더욱이 수출진흥확대회의가 끝나고 총리와 경제각료·공화당 주요간부·경제단체장들이 대통령과 함께하는 오찬회의는 서슴없이 애로사항을 말하는 박회장의 발언권을 한층 높여주었다.
박회장 시절에는 청와대 등 정부쪽의 주문사항이 꽤 많았다고 박회장은 술회하고 있다.
학생들의 데모가 격화되는 시점에서 교수들이 체제를 지지하고 학생들을 훈도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안을 마련하라는 지시에 따라 박회장은 74년 30억원을 출연, 산학협동재단을 만들었다.
박동맹 사건때는 미국의 대한 이미지를 개선할 수 있는 사업을 해보라는 주문에 따라 미하버드 대학에 1백만달러를 지원, 한국학 강좌를 개설하기도 했으며 정부가 못하는 대미민간 통상외교를 담당할 한미경제협의회도 이때 발족시켰다.
또한 이활회장 시절인 69년부터 만들어진 무역 특계자금이「수출진홍을 위한 판공비」란 명목으로 대통령에 의해 재의공관장들에게 건네졌다.
박대통령도 박회장의 요청을 아주 잘 들어주었다고 한다.
한 예로 「중공」이 뉴욕의 한 호텔을 인수하고 무역대표부를 개설하자 박회장은 『이때도 연락 사무소를 건립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과장 보고로 2천5백만달러가 드는 뉴욕코리아 트레이드 센터 건립을 허가받았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국정감사가 있는것도 아니고 언론의 기능이 활성화되지 못한 시점에서 박충훈 회장은 절대권력자의 지원아래 실질적인 경제 총리의 행세를 할 수 있었다.
무협회장을 그만두고 최규하 대통령에 의해 국무총리로 발탁된 박회장은 지금도 자신의 화러한 경력중에 『무역협회 회장이 가장 보람있고 신나는 시절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박회장이 총리로 간 뒤 김원기씨가 8개월, 유창순씨가 7개월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박회장의 17대회장 잔여임기를 채웠다.
이후 신병현씨가 18대 회장을 맡았으나 취임 후 1년8개월만에 아융산 사건이 터져 부총리로 옮겨가면서 남덕우 회장에게 넘기게 됐다.
신회장은 재임기간동안 무협이 갖고있던 KOEX(한국종합전시장)와 고려무역의 운영권을 경쟁단체인 무역진홍공사(KOTRA)에 뺏긴 것을 아직도 많은 무협직원들은 뼈아프게 생각하고 있다.
당시 윤자중 KOTRA사장이 청와대보고를 하면서 자금난에 허덕이는 KOTRA를 살리는길은 KOEX와 고려무역을 인수받는 길밖에 없다고 말했고 당시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인수에 따른 내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날버락을 맞은 무협은 민간단체의 자산을 무슨 근거로 뺏을수 있느냐며 거세게 항의했지만 정작 신회장은 『정부정책이 그렇다면 할수없지』라는 반응을 보여 신회장의 그같은 태도를 못잊는 사람들이있다.
결국 KOEX문제는 소유권은 유지한채 운영권만 넘기는 선에서 다시 타결을 봤지만 무협으로서는 큰 손해를 봤다.
신회장의 뒤를 이어 회장직을 맡은 남덕우 회장은 여러가지 일을 했다.

< 웅대한 무역센터 >
남회장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 또한 대단했다.
남회장은 층리를 그만둘때 아주 이례적으로 중앙청앞 광장에서 사열을 받는 이임식을 갖기까지 했다.
남회장이 취임하자마자 가장 심혈을 쏟은 것은 삼성동 무역센터의 건립이다.
박충훈 회장시절 종합전시장 건립을 위해 평당 6만원씩 사들인 4만평의 대지외에 2만평을 추가로 구입, 무역센터를 건립해 놓는다는 것이 남회장의 초기구상이었다.
지금도 무역협회의 많은 사람들은 남회장이 아니고서는 그처럼 어마어마한 무역센터를 건립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예컨대 공기가 올림픽 개최에 맞춰져 있었던 관계로 땅부터 파고 설계를 시작할 정도로 경우에 따라서는 절차를 무시해야했고 그에따른 모든 뒤탈을 총리출신 남회장이 막아주었다는 것이다.
부동산 투기를 했다는 일부의 비판이 없는것도 아니지만 남회장 자신은 무역센터 건립을하나의 작품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번 의원들의 외유와 관련된 특계자금 의혹사건으로 남회장은 「연임의사가 없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함으로써 사실상 퇴진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래저래 무역협 회장직은 힘든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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