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광장 중국교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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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작년12월 어느날 오전10시, 뒤늦은 겨울 날씨가 코끝을 빨갛게 만들던 날의 서울 서대문 적십자병원 마당이었다. 두 사람 세 사람씩 서둘러 모여드는 이들은 다름 아닌 우리 동포들, 이름하여 중국에 있는 우리 동포들이다. 그들 손엔 예외 없이 커다란 가방이 있었고 빠른 걸음에 조금 지쳐있는 표정이었다. 우리정부가 닷새동안 그들이 팔려고 가지고 온 약을 사준다는 「뉴스」를 듣고 찾아드는 그들에겐 그러나 안도와 희망의 기색이 엿보였다.
그들이 줄지어 병원 뒤쪽 전문대학 강당으로 들어서는 마당엔 「환영, 증국교포 관광단」이란 플래카드를 단 대형 버스가 대기 중이었다. 모든 수속 절차를 끝내고 나오는 사람들에겐 서울시내 몇 군데, 예를 들면 올림픽공원 등지로 관광 안내를 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오, 그래. 정말 잘하는 일이야. 역시 대한민국이야』순간이나마 한기를 잊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지며 나는 무작정 그들을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첫날엔 1천5백명이나 되는 동포들이 다녀갔다는 기사를 보았는데 그날은 생각보다 그리 붐비지는 않았다.
나는 쭈빗거리며 그들 중 대화에 끼어줄 사람을 골라 얘기를 걸었다. 어디에서 왔으며, 하는 일은 무엇이며, 왜 왔느냐는 등을 물어보았다.
우선 자동판매기의 코피를 대여섯잔 남짓 돌리면서(역시 부르좌적 발상이었다) 짐짓 호기심을 불러 일으킬 요량이었으나 그런 산이 아니더라도 그들은 나를 아무런 경계없이 상대해주었다. 하얼빈에서 왔고 전구상에서 일한다는 자매와 우리 돈으로 한달에 만 5천원의 월급을 받는다는 국민학교 선생인 이모, 그의 남편 등과 얘기를 나눴다. 그들은 입을 모아 『고국에 사는 친척들을 만나 한국에서 그리도 잘 팔린다는 중국약을 모아 관광을 해보겠노라는 계산이었다』고 했다.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는 대목이 「관광」이야 약팔아 돈 좀 만들어 잘 살아보겠다는 것을 감추고 있는 속마음이야 모를 리 없었지만 어쩌다 막차를 탄 그들의 계산이 못내 안타까웠다.
먼저 다녀간 사람들은 평생을 먹고 남을 만큼 훌륭하게 약장사역을 해냈다는데 이들은 어쩌다 모처럼 찾은 고국 서울의 덕수궁 앞이나 파고다공원에서, 그리고 뒷골목 여숙에서 떳떳지 못한 모슴습로 우리와 마주쳤단 말인가. 그러나 중국약이라면 혈안이 되어 「싹쓸이」기록을 남긴 북경아시안게임 때의 추태가 떠오르면서 나는 곧 부끄러웠다.
머나먼 타국에서 한민족의 자존심 지켜가며 살고 있는 우리동포에게 몰지각한 우리의 졸부들이 던진 황금의 유혹은 지탄받아야 할 일이 아닐는지. 나는 국민학교 교사인 이의 손에 들려있던 베 한 필을 무작정 들고 돌아서면서 『이것으로 속죄가 될까』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자문해 보았다. 박정자<연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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