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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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실용성과 편의성만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는 거추장스러울 만큼 가늘고 긴 장죽은 다분히 비활동적인 은자들의 끽 연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장죽에는 아론의 지팡이보다 더 지엄한 권위가 있었다. 경로사상이 짙은 한국전통사회에서 그것은 신비한 힘을 갖기도 했었다.
버릇없이 구는 손자녀석들이나 방자하고 건방진 무뢰한들에게 할아버지가 휘두르는 삼척장죽은 혼란스런 상황을 질서로 유도하는 신비한「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장죽의 길이는 행동 력과 반비례하고, 장죽은「거리의 문화」가 아닌「방의 문화」로서 「행동의 논리」보다는 「잠자는 논리」에서 비롯된 발명품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므로 3척 장죽을 우리 고유의 멋이라는 영역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탈 기능 론 적인 관점이 요구된다.
멋이란 애당초 기능적이고 미적인 차원을 초월하는 것으로「조화 속의 파격」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죽은 크게 세 부분, 즉 입으로 무는「물부리」담배를 담는「대 꼬 바리」, 이 두 부분을 연결하는 기다란「설대」등으로 구성된다.
장죽의 품위와 가치는 바로 물부리와 대 꼬 바리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가장 대중적인 것으로는 놋쇠로 만든 장죽이지만 백 동이나 오동으로 만들어진 것은 구한말 당시의 시가로 쌀 한 가마 값을 호가하기도 했다.
오동은 구리합금으로 순동1냥에 순금 5푼 가량을 섞어 만든 다음 오죽(검은 대나무)을 끼움으로써 완성된다.
장죽에는 흔히「도복」「희」자 등을 즐겨 시문 했다. 장수무병을 바라는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이 여기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물부리와 대 꼬 바리에 새겨넣는 문양기법을 가리켜 현대 공예작가들은 상감기법이라고 부른다.
국내 장죽 명산지로는 동래 죽을 비롯, 남원 죽과 울산 죽을 꼽아왔다. 그러나 서양식 파이프가 들어오고 흡연풍속이 달라지면서 장죽은 어느 샌가 민속박물관·관광상품 진열대 위에서 나뒹굴게 됐다.
모닝코트에 실크 해트를 쓰고 스틱을 짚고 다니는 모습은 영국인들의 독특한 멋이다.
우리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자기도취도 경계해야 할 것이지만 강구한 역사 속에서 다듬고 길들여져 온 고유문화에 대한 자기부정도 역시 경계해야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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