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당대회 수싸움 유리 …'김근태 고립' 계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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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은 지난해 여름 한나라당을 향해 대연정을 제안할 때도 서너 차례 편지형식을 빌렸다. 그래서 여권 내에선 4일 열린우리당 당원들에게 편지를 보낸 것을 놓고 '노무현식 편지정치'가 다시 시작됐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번 편지는 노 대통령 단독 작품이다. 1일 밤 열린우리당 지도부의 '의원 설문조사'추진 결정이 계기가 됐다. 당.청 충돌의 와중에 설문조사로 당의 진로를 정하겠다는 지도부의 일방적 결정에 대한 강력한 반격인 셈이다.

노 대통령 의중에 밝은 인사들은 앞으로도 노 대통령의 '편지정치'는 계속될 것으로 본다.

노 대통령의 편지엔 여러 구상과 결심이 녹아 있다. 우선 당 진로를 결정하기에 앞서 당원들이 총궐기할 것을 호소했다. 그는 열린우리당의 주인은 지도부도, 의원도 아닌 당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궐기의 수단은 전당대회다. 현 비대위를 해산하고 전당대회에서 승부를 가리자는 게 핵심이다. 편지를 전달한 청와대 정태호 비서관도 당 지도부에 이 점을 분명히 밝혔다고 한다.

호주를 국빈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이 5일 호주 캔버라 공항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에서 마이클 제프리 연방 총독과 함께 의장대 사열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캔버라=연합뉴스]


노 대통령이 당초 탈당 가능성을 시사했다가 잔류로 선회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 측근 인사는 "당내 의원 분포는 어차피 친노(親盧)가 열세다"며 "탈당해서 당을 만들 경우 정당정치의 현실을 고려할 때 지리멸렬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반면 친노가 과반수를 확보하고 있는 현재의 기간당원을 발판으로 몰리고 있는 상황을 반전시키겠다는 의도가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결국 노 대통령 편지에 담긴 핵심 메시지는 앞으로 의원이 아닌 당원과 함께 새 판을 짜겠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이 이런 결론을 내린 배경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한다.

첫째, 내년 대선의 동력이 현 열린우리당 대선 후보군이나 의원들 사이에서 나오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바닥정서를 새로 만들고 이를 통해 새로운 세력을 형성해 내야 한다고 결심했다는 것이다. 친노 그룹의 한 의원은 "노무현 정권은 옛 민주당 의원들로부터 나온 게 아니라 국민 경선을 통해 탄생했다는 얘기를 지금도 한다"고 말했다.

다음 수순은'김근태 고립' 전략이다. 자신과 사사건건 각을 세우고 있는 김근태 의장으로 전선을 좁히면서 정동영 등 다른 계보들과는 연합전선의 가능성을 열어 두겠다는 구상이다. 실제 당내 친노그룹과 청와대 참모들은 정 전 의장에 대한 비판을 삼가고 있다.

이와 함께 노 대통령은 영남 민주화 세력 결집에 착수할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 핵심 인사는 "당은 당원들을 중심으로 세를 형성하고, 동시에 영남 지지기반을 복원시켜 앞으로 나올 열린우리당 대선 후보에 영남조직을 결합시키겠다는 생각"이라며 "2002년 3월 16일 광주 경선에서 '나는 영남에서도 표를 얻을 수 있다'는 노 후보의 말 한마디가 광주 돌풍을 만들어 냈다는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이런 노 대통령 구상의 끝자락은 연합정치다. 짧게는 정계개편, 길게는 내년 대선구도까지 연합의 범주에 넣고 있다. 여권 핵심인사는 "노 대통령의 정치는 한마디로 바닥정치다. 밑에서 동력을 끌어내 위로 향한다. 그래서 이 싸움은 당내 갈등뿐 아니라 내년 정권 재창출 과정에서도 승산이 높은 게임"이라고 말했다.

이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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