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패션의 메카"자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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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조선호탤쪽 소공로에서 출발, 롯데백화점올 거쳐 광교에 이르는 5백여m 거리에는 모두 1백17군데의크고 작은 고급양복점들이밀집해 있다. 한국남성패션의 1번지.
조흥은행 본점쪽 광교일대에 15곳, 롯데백화점·호텔의 지하및 2층에 19곳, 플라자호텔 지하를 비롯한 소공로일대에 23곳이 몰려있으며 반도조선아케이드 건물안에만 무러 50곳의 양복점이 들어서있다.
1889년 일본인이 현광화문우체국 옆자리에 「하마다양복점」 을 연 것이 이거리의 효시.
고종등 황실의 양복을 맞춰주기 시작하면서 양복점들이 늘기 시작했고 그이후해방될 때까지 일본인에게양복기술을 배운 한국인들은 종로일대에, 일본인 양복점은 일본인이 많이 살던남산과 가까운 충무로 일대에 각각 자리잡았다.
해방으로 일본인상점들은철수하고 6·25를 거치면서종로일대의 양복점 건물이파괴돼 그나마 건물상태가좋았던 광교일대로 양복점들이 대거 몰렸다.
지금은 재개발과 도로확장공사로 15곳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50,60년대만해도 40여곳이 밀집해 있었으며 한영·미조사·미림등의 유명양복점들은 이때 큰명성을 떨쳤다.
이후 각종 공사로 건물이 없어진 양복점들이 반도조선아케이드내로 이전하고소공로에 조선·플라자호텔이 들어서면서 소공로 일대에 외국인들을 상대로한양복점들이 늘어났다.
7O년대만 해도 환율탓으로 양복값이 국제시세에 비해 크게 싼 편이어서 외국인들을 상대로한 영업이 짭짤했고 특히 일본사람들은 한번에 대여섯벌씩 맞춰가곤 했다는 것이 이곳사람들의 「황금기」 에 대한기억이다.
『요즘은 그런 외국사람들도 없고 국내인들도 기성복으로 몰리는 형편이라 관계· 재계의 상류계층 인사듣만이 주요 단골이죠.』
소공동 해창양복점의 박익휘씨(50)는 이승만전대통령· 장면박사·윤보선전대통령·최규하전대통령등이 모두「해창팬」이었다고 전한다. 이밖에도 박준규현국회의 장은 광교의 「한영」, 김영삼민자당대표최고위원은 「체스타필드」 의 단골이며 노태우대통령은 롯데호텔지하「세기」 에서 도맡아 옷을만들고 있다.
전두환전대통령은 보안사령관때까진 「해창」 을 이용했으나 대통렴취임이후엔 양복점에 대한 「보안」 까지 철저, 단골이 어디였는지 알려지지 않은 상태.
박두배대통렴은 충무로2가 「신두활」 에서 종종 옷을 맞췄는데 단골을 바꾸려고 이 일대 모양복점 주인을청와대로 불러들였으나 그주인이 옷을 재면서 일본용어를 자꾸 쓰자 『내가 왜놈에게 옷맞추느냐』며 쫒아냈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이곳 양복점에 종사하는사람은 어림잡아 1천명선.
자식들이 좋은 직장을 버리고 대를 이어 가업을 계승하는 양복점도 이곳 거리의 자랑.
창업 60년을 맞은 해창양복점의 경우 이용수씨(방)의 두아들 일신씨(62·서울대공대졸업·소공동본점) 와 순신씨(56· 서울대상대졸업·롯데호텔분점)가 뒤를 이었고 손자 정제씨(37) 도 지난해 신사동에 분점을 개설, 「장인3대」를 이루고 있다.
다양한 체형의 기성복이쏟아지면서 5년전만 해도30%에 불과하던 기성복의 양복점유율이 지난해엔 50%를차지, 기존의 양복점들이 경영난에 허덕이는 것도 사실.『보증금 5천만원선에 월1백50만원이상의 임대료를못내 「이름값」 명목으로 권리금 몇푼받고 문을 닫는곳도 해마다 서너군데썩 생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맞춤복이 갈수록 귀해져 비싸지는 외국의 추세를 볼때 전문성을 갖춘다면 앞날이 그리 어두운 것도 아니죠.』 광교 힐톤양복점 이성기씨 (55)의 전망.
그러나 이 일대 양복점의상당수가 35만∼50만원정도하는 양복 한벌의 가격을10∼20%를 깎아 상품권을발행,대기업 하청업자·공무원 상대업자들에게 무더기로 팔아넘기고 있어「최고급 양복점거리」 라는 이곳의 명예를 깎아내리기도 한다. <이효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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