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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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우리의 화로는 단순히 난방기구의 역할만 하는것이 아니다. 대가족제도의 전통적인 가족체제에서「대학의 장」을 마련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가족 간의 끈끈한 정을 이어주는 역할도 했다.
춥고 긴 겨울밤 화롯가에서 피어나는 인정은 바로 한국인의다정다감을 상징한다.
할아버지는 부젓가락으로 불씨를 헤쳐가며 밤이나 인절미를 구워 손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손자들은 할아버지의 옛날이야기에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른다.
특히 눈오는 날 밤 화로를 가운데 두고 식구들끼리 모여 앉아 읏음 꽃을 피우는 광경이 등잔불에 비쳐 문밖으로 투영되는 모습은 우리의 대표적 겨울영상이었다.
선비들은 화롯불 피워놓고 벗들을 초대, 따끈하게 술을 데워 마시며 세상사와 학문에대해 밤새 토론을 벌였고 부인들은 남편의 늦은 귀가에 화롯불에서 구수한 찌개를 끓여 내놓아 남편의 한기를 가시게 해주기도 했다.
발화기구가 없었던 시절 화로는 불씨를 보존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우리 선조 들은 불씨가 집안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아녀자들은 불씨 간수하는 일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겼다.
가문에 따라서는 불씨를 꺼뜨린 며느리는 재앙을 불러온다는 이유로 시집에서 내쫓겼다.
또 불씨가 담긴 화로를 시어머니가 맏며느리에게 대대로 물려주었고 증가에서 분가할 때는 맏아들이 불씨가 든 화로를 들고 이사한 집에 먼저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시집가는 신부도 화로는 놋대야·요강과 함께 반드시 지참해야하는 필수품이었다.
민속학자들은 『새로 집을 짓거나 이사한 집에 성냥·양초 등을 선물하는것도 불씨를 소중히 한 관습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화로의 기원은 인간이 불을 발견하고 나서부터라고 민속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당시의 화로는 취사·난방·조명 등 다목적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화로의 종류도 놋·철·흙·곱돌로 만든 것 등 다양하며 용도별로는 손을 쬐는 수로, 부엌에서 쓰는 풍로 등이 있다.
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우리의 겨울을 훈훈한 정감으로 데워주던 화로는 이제 골동품가게나 가야 구경할 수 있게 됐으며 꽃꽂이용기 등 관상용으로나 사용되고 있는 정도다.
노변정담이 그리운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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