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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르띠에 전시를 해석하는 몇 가지 코드 [비크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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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가봤어?" 요즘 공간은 브랜드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단순히 물건을 판매하는 장소를 넘어 브랜드를 설명하고, 태도와 세계관을 녹여내니까요. 온라인 홍수 시대에 직접 보고 듣고, 만지며 감각할 수 있는 공간은 좋은 마케팅 도구가 되기도 하죠. 비크닉이 사람들의 발걸음을 이끄는 매력적인 공간을 탐색합니다. 화제의 공간을 만든 기획의 디테일을 들여다봅니다.

사이사이 끼어든 반가운 휴일이 이어지고 있는 5월입니다. 오늘은 모처럼의 여유로운 시간을 의미 있게 채워줄 전시 소식 하나를 들고 왔어요. 바로 지난 1일 서울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에서 개막해 오는 6월 30일까지 이어지는 ‘까르띠에, 시간의 결정(Cartier, Crystallization of Time)’ 전 입니다.

지난 1일부터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고 있는, '까르띠에, 시간의 결정' 전시 전경. 사진 까르띠에

지난 1일부터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고 있는, '까르띠에, 시간의 결정' 전시 전경. 사진 까르띠에

여러분은 주얼리 전시에 다녀 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일반적 미술 전시와 달리, 주얼리 전시는 가끔 허무하게 여겨질 때가 있어요. 보는 것만으로 황홀하고 아름답지만, 눈요기 이상을 얻어내기가 어려운 경우가 있어서요.

만약 이런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면, 이번 까르띠에 전시는 편견을 깨트릴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 진귀한 보석이나 주얼리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주제를 축으로 잘 기획된 전시라는 면에서죠.

돌과 나무, 그리고 보석

“스스로 큐레이션 하지 않는다.” 지난달 26일 열린 전시 기자간담회에서 피에르 레네로(Pierre Rainero) 까르띠에 이미지·스타일&헤리티지 디렉터는 이런 얘기를 전했어요. 그는 “외부 기관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비전이나 철학을 가지고 까르띠에 주얼리의 예술적 차원을 대중과 공유하길 바란다”고 말했죠.

실제로 지금까지 35년간 41회의 전시를 진행했지만, 까르띠에는 직접 주최하기보다 외부의 공신력 있는 기관을 통해 주얼리를 선보여왔어요. 이번 전시도 중앙일보와 서울디자인재단이 주최했고요. 전시의 기획과 디자인에는 일본의 건축회사 ‘신소재연구소’가 참여했어요.

'까르띠에, 시간의 결정' 전시 포스터. 사진 까르띠에

'까르띠에, 시간의 결정' 전시 포스터. 사진 까르띠에

여기서 이 전시를 이해하는 한 가지 코드가 나와요. 바로 ‘소재’죠. 신소재연구소는 아티스트 스키모토 히로시와 건축가 사카키타 토모유키가 이끄는 건축회사예요. 신소재라고 하면 혁신적인 소재를 연구하는 곳인가 싶지만, ‘오래된 소재야말로 진정한 새로움’이라는 가치 아래 돌이나 나무 같은 자연 소재를 연구하는 데 더 몰두하고 있어요.

전시장에도 주얼리와 함께 곳곳에 돌과 나무, 패브릭 등 다양한 소재가 등장했어요. 우선 공간에 들어서면 은은한 나무 향이 나고요, 일본의 화산석인 오야석을 높이 쌓아 전시장 구조를 만들었죠. 주로 불상을 만드는 1000년 이상 된 나무를 깎아 목걸이 전시대인 토르소를 대신하기도 했어요.

거친 표면의 오야석 사이로 보석이 떠오르듯 세팅되어 있다. 오랜 세월을 응축한 나무결 무늬가 돋보이도록 정교하게 제작되어 보석들을 받치고 있는 토르소도 눈길을 끈다. 사진 까르띠에

거친 표면의 오야석 사이로 보석이 떠오르듯 세팅되어 있다. 오랜 세월을 응축한 나무결 무늬가 돋보이도록 정교하게 제작되어 보석들을 받치고 있는 토르소도 눈길을 끈다. 사진 까르띠에

거칠고 투박한 돌이나 나무는 정교하게 세팅된 보석들과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죠. 바로 모두 지구라는 행성에서 만들어진 산물이라는 점이에요. 그 과정에 개입하는 것이 ‘시간’이고요.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지층에 쌓인 압력이 결정화된 것이 보석이라면, 돌과 보석은 사실상 같은 원류를 지닌 것 아닐까요.

이처럼 전시에는 시간의 축으로 빚어낸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져 있어요. 시간과 보석, 돌과 나무를 같은 우주적 산물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이 전시가 한층 비범하게 다가올거예요.

웅장한 시간의 낭만주의

전시 도입부를 장식한 스기모토 히로시, 타임 리버스드, 2018. 사진 까르띠에

전시 도입부를 장식한 스기모토 히로시, 타임 리버스드, 2018. 사진 까르띠에

전시의 첫 번째 작품으로 등장하는 ‘역행 시계’는 전시의 테마인 ‘시간’을 직접 은유하고 있어요. 이번 전시를 위해 스키모토 히로시가 만든 설치물이죠. 곧이어 프롤로그 ‘시간의 공간’이 펼쳐집니다. 이곳에서는 20세기 초 개발된 까르띠에의 탁상용 시계 ‘미스터리 클락’ 시리즈를 볼 수 있습니다. 투명한 사파이어 크리스털 디스크로 만들어진 다이얼(문자판)에서 마치 허공에 뜬 듯한 한 쌍의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모습이 상상력을 자극하죠. 마치 공중에 뜬 시간이라는 수수께끼를 잡아 둔 것 같달까요.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시곗바늘이 신비롭다. 1918년 까르띠에 파리에서 제작한 모델 A 미스터리 클락.사진 까르띠에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시곗바늘이 신비롭다. 1918년 까르띠에 파리에서 제작한 모델 A 미스터리 클락.사진 까르띠에

작품들을 감싸듯, 천장에서부터 떨어져 내리는 고대 직물 ‘라(羅)’도 드라마틱하죠. 라는 날실을 꼬아 만든 직물이에요.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존재했고, 고려 시대에 크게 꽃을 피웠죠. 전시장에 설치된 라는 전통문화연구소 ‘온지음’이 복원했어요. 과거의 것을 온전히 현재로 가져왔다는 점에서 또한 시간의 메타포로 해석할 수 있죠. 반투명한 재질 너머로 반짝이는 까르띠에의 작품들에 신비로운 오라(AURA)를 더하는 장치이기도 하고요.

고대 직물 라를 전시 디자인에 활용했다. 프롤로그 전시장 전경. 사진 까르띠에

고대 직물 라를 전시 디자인에 활용했다. 프롤로그 전시장 전경. 사진 까르띠에

최초의 플래티넘, 그리고 찌그러진 시계

이번 전시에는 까르띠에의 1970년대 이후 현대 작품들과 20세기 초기 작품들 300점이 공개됐어요. 시간이라는 큰 이야기 구조 아래 까르띠에가 쌓아온 이정표 같은 작품들을 선별하되, 세 가지 테마로 나눴다고 해요. 소재의 혁신, 형태의 혁신, 그리고 문화적 혁신을 보여주는 작품들이죠.

첫 번째 장 ‘소재의 변신과 색채’에서는 참신한 주얼리 디자인을 위해 과감하게 선택한 소재와 색의 주얼리들이 등장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플래티넘’이죠. 20세기 초 까르띠에가 처음으로 주얼리에 적용하기 시작해, 지금은 보편적 주얼리 소재가 됐어요. 다양한 유색 보석도 까르띠에만의 탐험적 정신을 잘 보여줘요. 업계에서 잘 사용하지 않았던 파랑·초록을 섞은 이른바 ‘피콕(공작새)’ 패턴을 탄생시키기도 했죠.

까르띠에 뚜띠 프루티 힌두 네크리스. 1936년 재봉틀 기업 싱어의 상속녀 데이지 펠로즈가 처음 주문·제작했다가 1963년 리디자인 됐다. 사진 까르띠에

까르띠에 뚜띠 프루티 힌두 네크리스. 1936년 재봉틀 기업 싱어의 상속녀 데이지 펠로즈가 처음 주문·제작했다가 1963년 리디자인 됐다. 사진 까르띠에

두 번째 장의 관전 포인트는 타이틀 그대로 ‘형태와 디자인’이에요. 까르띠에가 오랜 시간을 들여 탐구해 온 가장 아름다운 형태와 비율, 균형감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엄선됐어요. 주얼리는 미술품과는 달리 몸에 착용하는 제품이기도 하잖아요. 곡선의 몸에 착 달라붙을 것처럼 정교하게 제작된 주얼리들의 유려한 형태를 감상할 수 있어요. 배경이 되는 거칠고 투박한 오야석과의 대비로 한층 돋보이고요.

유려한 곡선이 돋보이는 형태의 주얼리들. 왼쪽은 브레이슬릿, 2014, 까르띠에 소장품. 오른쪽은 플래크 드 쿠(초커) 1903, 까르띠에 소장품. 사진 까르띠에

유려한 곡선이 돋보이는 형태의 주얼리들. 왼쪽은 브레이슬릿, 2014, 까르띠에 소장품. 오른쪽은 플래크 드 쿠(초커) 1903, 까르띠에 소장품. 사진 까르띠에

건축적이거나, 초현실적인 디자인, 주얼리와는 무관한 공업의 세계로부터 출발한 디자인 등 작품 곳곳 빛나는 창의성도 볼거리죠. 그중 찌그러진 시계 ‘크래쉬 워치’가 돋보여요. 런던의 한 고객이 교통사고로 망가진 시계를 수리하기 위해 가져온 시계에서 영감을 받은 초현실적 디자인이죠. 드라이버에서 영감을 얻어 전용 스크루 드라이버로 브레이슬릿의 나사를 조이고 푸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러브’ 컬렉션이나, 공업용 소재인 ‘못’에서 디자인을 따온 ‘저스트앵끌루’는 일상적이기도, 예술적이기도 하죠.

거대한 범선 속 주얼리, 시간으로의 항해

거대한 범선이 뒤집힌 듯한 형태의 전시장 전경. 사진 까르띠에

거대한 범선이 뒤집힌 듯한 형태의 전시장 전경. 사진 까르띠에

문화적 혁신을 보여주는 세 번째 장 ‘범 세계적인 호기심’에서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고대 이집트를 넘나드는 까르띠에 디자인의 원동력이 소개됩니다. 나무로 된 거대한 범선이 뒤집혀 놓인 듯한 전시장 디자인도 볼거리죠. 마치 최후의 방주에 귀하게 보관해둔 것 같은 피스들에 자꾸만 시선이 멈춥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문화권에서 영감 받은 화려하면서도 다양한 주얼리들을 감상할 수 있어요. 갑과 같은 일본의 공예품에서 착안한 화려한 베니티 케이스, 한국의 전통 장식품인 노리개를 연상시키는 브레이슬릿 등이죠. 이밖에 난초와 꽃 등 식물에서 영감 받은 아름다운 주얼리들,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것 같이 생동감 있는 뱀·호랑이·표범 모티브의 주얼리들은 그 자체로 생명력을 내뿜고 있죠.

뱀 모티프의 네크리스, 2009, 개인 소장품. 사진 까르띠에

뱀 모티프의 네크리스, 2009, 개인 소장품. 사진 까르띠에

보물은 주얼리만이 아니다

이번 전시에서 눈여겨볼 것은 다만 화려한 보석들 뿐만은 아니에요. 각 장 사이에 예고라도 하듯 테마를 응축한 ‘트레저 피스(보물)’들도 관전 포인트예요. 첫 번째 프롤로그의 역행하는 시계부터, 역시 스키모토 히로시가 직접 만든 ‘유리탑’, 큐레이션한 ‘조선 시대 나전 귀갑 산수문 빗접’이 등이 그것이에요. 마지막 장 앞에는 나무 덩굴 조각품과 조선 시대 ‘백자 다각병’이 놓였고요.

각 장 사이 등장해 전시를 예고하듯 설치된 트레저 피스들. 맨 왼쪽이 조신시대 백자 다각 병이다. 사진 까르띠에

각 장 사이 등장해 전시를 예고하듯 설치된 트레저 피스들. 맨 왼쪽이 조신시대 백자 다각 병이다. 사진 까르띠에

무엇보다 전시 곳곳에 펼쳐진 장대한 시간과 공간의 메타포를 눈여겨보길 권해요. 씨실과 날실이 정교하게 교차하는 ‘라’가 하늘거리는 전시 공간이 지금 여기, 단 한 번뿐인 찰나를 상징하고 있듯이요.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죠. 그동안 까르띠에의 주얼리를 감상할 수 있는 전시 기회는 분명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 이 ‘시간의 결정’ 전시가 주는 특별함은 바로 이 진귀한 보석들을 하나로 꿰어나간 이야기 그 자체에 있을 거예요. 어두컴컴한 전시관에 들어서면 나타나는 ‘역행 시계’가 이끌어주는 대로, 잠시 시간여행을 하는 것처럼 거꾸로 되짚어가며 지구의 시간이 만든 아름다운 산물들을 탐험해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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