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Review] 비밀의 영역 … 그곳의 민주화 과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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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은둔의 영역" 이었던 사생활은 그만큼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사진은 19세기 프랑스 그림인 ‘연인들의 은밀한 이야기’ [제공=새물결]

사생활의 역사 2, 5 필립 아리에스,

조르주 뒤비 엮음, 성백용 외 옮김

새물결, 각 896.1056쪽

각 권 4만3000원

'영화광'이라면, 도저히 안 볼 수 없는 영화라는 것이 있을 수 있다. 만약 박찬욱과 봉준호가 공동감독하고, 남자배우로 최민식.송강호.황정민이 나오고, 여자배우로 이영애.전도연.강혜정이 출연한 영화가 있다면 일단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법이다. 안 읽고는 배길 수 없는 책도 있다. 이번에 2권과 5권이 나와 완간된 이 시리즈가 바로 그것이다.

필립 아리에스와 조르주 뒤비가 책임편집하고, 폴 벤느, 로제 샤르티에, 린 헌트 등 기라성 같은 역사학자들이 집필자로 참여한 덕이다. 베개로 하면 딱 맞을 이 책을 처음 접한다면, '사생활'의 개념부터 아리송할 터. 그래서 시리즈 맨 앞에 조르주 뒤비가 한마디로 정의했다. "아무도 침범할 수없는 은둔의 영역"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강한 의문이 뒤따를 터. 그것의 '역사'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번에 나온 2권 '중세부터 르네상스까지'에서 뒤비는 그것이 가능한 이유를 설명한다. 회화영역에서 내밀한 삶의 영역을 묘사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역사가들이 옛사람들의 사생활을 넘보는 '염탐꾼' 노릇을 할 수 있게 된 계기다. 일상사에 관한 고고학적 성과도 한몫 거들고 있다. 그리고 텍스트와 기록문서를 들 수 있다. 강력해진 국가가 신민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수다스럽고 꼬치꼬치 파고드는" 문서들을 작성해 체계적으로 관리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드러나는 역사적 실체는 무엇일까 궁금할 터이다. 다른 무엇보다 단일하고 안일한 역사해석에 균열을 일으킨다. 흔히 중세 때에도 사적 영역의 세포는 가정이고, 이는 부부로만 이루어졌다고 본다. 하지만 치밀한 조사에 따르면, 13세기에는 한 가구가 평균 여섯명으로 구성되었고, 15세기에는 일곱명 남짓인 것으로 나타난 지역이 있었다. 또한 "사적인 집단의 경계가 가정의 문턱과 일치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 던 것으로 분석되었다. 가계나 가문에 대한 자의식을 공공연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함께 나온 5권은 '제1차세계대전부터 현재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주목할 부분은 앙투안 프로가 쓴 서문이다. 상층 부르주아의 집에는 응접실이 다른 방들과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그곳은 남이 봐도 괜찮다고 판단한 것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말 그대로 방문객을 맞이하는 곳으로 아이들이 들어와서는 안 되고, 가족 사진 따위도 없었다. 응접실은 사생활과 공적 생활 사이에 놓인 이행공간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광산지역의 광부사택이나 지방의 촌락에 사는 주민들은 사생활을 보호할 담조차 쌓을 수 없었다. 사생활과 공적 생활이 뒤섞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비교에서 볼 수 있듯, 사생활을 누린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계급적 특권이었다. 그러기에 "20세기는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관행이, 사회 모든 계층에서 일상생활을 규정하는 원리로 서서히 확대되어간 시기"라 할 수 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사생활의 민주화 역사" 인 셈이다.

다음으로 흥미로운 부분은 '현대의 사생활은 미국을 모델로 하고 있는가?'이다. 세계화가 기실 미국화임을 인정한다면, 가장 내밀한 영역에서도 미국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프랑스를 예로 든 긴 논의 끝에 소피 보디 -장드로는 낙관적인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여기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서는 안될 성싶다. 원저가 85년에 나왔다는 점을 감안해야 하는데, 오늘날 미국이 보이는 행태가 "미국의 패권주의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정체성을 위기에 빠트리지 않고 자신을 유지, 확대시킬 수 있었다"고 볼 수만은 없기에 그러하다.

이 엄청난 분량의 인문서를 통독하다보면, 역사를 사생활과 공적 영역의 '투쟁'으로 볼 수도 있겠다 싶어진다. 따지고 보면, 시공간의 구별을 넘어 공적 영역은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와 규율을 사생활에 강요해 왔고, 사생활은 이에 맞섰다. 그렇다면 지금 이곳에서 우리의 사생활의 영역은 어떠한가. 감시와 통제, 훈육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기우만은 아니리라.

이권우<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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