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밥 먹는 10살 산이, 반장 됐다…"허팝 만나고 싶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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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도 먹고 싶고요, 리소토요. 리소토가 내 ‘최애(가장 좋아하는)’ 음식이거든요.”

2일 서울대병원 어린이병원 5층 병동에서 만난 윤산(10)군 에게 먹고 싶은 음식을 묻자 씩씩하게 답했다. 하지만 산이는 이 음식을 거의 먹을 수 없다. 또래가 즐기는 치킨과 고기는 평생 맛본 적이 없다. 산이는 태어나자마자 ‘가성 장폐쇄’란 희귀병을 진단받았다. 장의 운동 신경 발달이 미숙한 병이다. 수술이나 약으로 치료되지 않는다. 가슴에 꽂아둔 중심정맥관을 통해 공급되는 수액 영양이 밥을 대신한다. 산이 엄마가 직접 수액을 놓는다. 평생 이런 보존적 치료를 해야 한다.

희귀병을 앓는 윤산(10) 군과 엄마 임조화(42)씨가 2일 서울대병원 어린이병원 벤치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장진영 기자

희귀병을 앓는 윤산(10) 군과 엄마 임조화(42)씨가 2일 서울대병원 어린이병원 벤치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장진영 기자

3개 공약 내걸어 반장, 다음 목표는  

어릴 땐 그래도 죽ㆍ면 같은 걸 어느 정도 먹었는데 지금은 장이 늘어나 고형식(딱딱한 음식물 섭취)이 사실상 어렵다. 거의 수액 영양으로 배를 채우고 부족한 건 영양 음료로 메우는데 100%는 아니다. 산이 엄마 임조화(42)씨는 “한때는 산이 앞에서 밥숟가락을 드는 것조차 죄스러울 때가 있었다”며 “뭐 먹고 싶다고 하면 ‘안 된다’고 하다가도 짠하다. 조금 먹는 건데 그마저도 주지 못해서…”라고 말했다.

산이는 병원이 집처럼 익숙하다. 돌 때까지 여러 수술을 받으며 병원에 살다시피 했다. 산이 아빠는 한 달에 한번 왕복 10시간 전남 나주집에서 서울대병원까지 차를 몰고 가 한 달 치 수액(15박스)과 필요한 각종 약제를 챙겨온다. 수액을 공급하는 정맥관은 사흘에 한 번씩 소독하고 매주 바늘을 교체한다. 그럼에도 1년에 한두 번씩은 고열로 시작되는 감염이 산이를 괴롭힌다. 관을 제거하고 다시 이식하는 수술 등을 19차례 이상 받았다. 지금도 40도 넘는 열로 바이러스 감염이 의심돼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있다. 다행히 일반 폐렴으로 진단돼 어린이날 전날 퇴원할 예정이다.

산이 엄마 임씨는 “희귀병이란 게 평생 가지고 가는 거란 걸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다”면서도 “산이와 하루하루 즐겁게 살고 싶다”고 말한다. 장진영 기자

산이 엄마 임씨는 “희귀병이란 게 평생 가지고 가는 거란 걸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다”면서도 “산이와 하루하루 즐겁게 살고 싶다”고 말한다. 장진영 기자

그래도 산이는 씩씩하다. 또래보다 작고 말라 ‘땅꼬마’ ‘멸치’라는 별명으로 불리지만, 최근에는 학교에서 4학년 반장에 뽑혔다. 경쟁자 5명을 제치고 과반 득표에 성공했다. 마니또ㆍ과자파티ㆍ메타버스 소통 등 3개 공약이 유권자의 마음을 샀다. 내친김에 산이는 전교 회장에도 도전해볼 요량이다. 학교에서 초능력을 주제로 발표할 때 산이는 “나는 갖고 싶은 초능력이 없다. 나 자신에 대해 너무 만족한다. 그래도 하나 가질 수 있다면 달리기를 잘하는 것”이라고 했다. 산이는 장루(인공항문)를 두 개 달고 있어, 전력질주가 쉽지 않다.

“평생 안고 가야 하지만, 매일 즐겁게” 

산이의 꿈은 컴퓨터 공학자이다. 산이 엄마 임씨는 “낫지 못해도 커서 원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다면 불행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산이가 좋아하는 코딩 등을 어렸을 때부터 같이 공부했다”고 했다. 산이는 최근 전남창의융합교육원에 합격했다. 임씨는 “영재원에 덜컥 합격할 줄 모르고 되면 허팝(실험 등을 주제로 영상을 찍는 유튜버)을 만나게 해준다고 했는데 큰일이다. 편지라도 써볼 참”이라며 웃었다. 산이는 어린이날 받고 싶은 선물로 허팝과의 만남, 태블릿 PC 두 가지를 얘기했다.

임씨는 “열심히 해도 병이 기적처럼 완치되는 게 아니라 희귀병이란 게 평생 가지고 가는 거란 걸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다”고 했다. 그는 “가족이 잘 도와 이겨내고 있다”라며 “산이가 체육대회에 참가했다고, 반장 됐다고 가족처럼 기뻐해 주는 의료진 도움도 컸다”고 했다. “부작용, 합병증 있는 아이들도 있는데 더 나빠지지 않길 바라며 하루하루 즐겁게 살려고 한다”고도 했다.

산이와 같은 병을 앓는 수진(8ㆍ가명)이는 대안학교에 다닌다. 음식을 조금씩 먹긴 하는데 토하고 배가 아프면 바로 금식해야 한다. 수진이 엄마는 병원에서 조제해준 수액을 받으러 이틀에 한 번꼴로 보랭 백에 아이스팩을 챙겨 간다. 어릴 때부터 수진이에게 훈련을 시켰는데 아직 장루백을 다루는 게 서툴다. 학교에서 수진이가 장루백을 버리다가 옷에 튀면 전화가 오고 엄마가 달려가 옷을 갈아 입힌다.

산이의 꿈은 컴퓨터 공학자다. 최근 전남에 있는 영재원에 합격했다. 장진영 기자

산이의 꿈은 컴퓨터 공학자다. 최근 전남에 있는 영재원에 합격했다. 장진영 기자

수진이 엄마가 가장 속상한 순간은 아이가 “나는 왜 이렇게 달라?” “교수님이 언제쯤 다 낫는다고 해?”하고 물어올 때다. 그래도 엄마는 “예전 같으면 이런 애들이 못 먹고 하늘나라 갈 수도 있었겠다 싶다. 영양을 줄 수 있는 수액이 있어 감사하다”라며 “학교도 못 갈 줄 알아 홈스쿨링을 생각했는데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했다.

이건희 사업이 희망, 여러 지원 손길 

지난해부터 산이, 수진이 같은 환자들을 돕기 위해 ‘가정 정맥 영양 지원 시스템 구축 사업’(총괄 책임자:고재성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이 시작됐다. 고(故)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유족이 2021년 5월 소아암·희귀병 극복에 3000억을 기부하면서 시작된 이건희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직접적으로는 치료비(2023년 약 35만원씩 45명), 간접적으로는 교육자료 제공, 홈페이지 제작 등이 지원된다. 전국 16곳 병원의 소아청소년과, 소아외과 의사와 약사, 간호사, 영양사 등 네트워크가 꾸려져 장기적인 코호트 연구도 닻을 올렸다.

문진수(소아청소년과 교수) 서울대병원 이건희 소아암ㆍ희귀질환사업단 공동연구사업부장은 “장 빼고 문제가 없는 애들이라 잘 도와주면 사회생활을 잘할 수 있지만, 전국에 환자가 100명이 안 되는 희귀병이라 일반적인 정부 지원으로는 연구가 어렵다”라고 했다. 이어 “희귀질환과 소아암을 타깃으로 하는 펀드(기부금) 덕분에 연구할 수 있게 됐다”라며 “법ㆍ제도를 마련하는 데 발판이 될 것”이라고 했다.

산이가 2일 서울대병원 어린이병원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산이가 2일 서울대병원 어린이병원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같은 사업부 이경재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10년 정도 추적 관찰하면 몇 년간 가정 정맥 영양을 했고, 합병증은 얼마나, 어떻게 발생하는지, 장 이식하는 애들은 얼마나 되는지 등 국내 환자에 그간 없던 의미 있는 연구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데이터를 토대로 해외처럼 가정 정맥 영양 시스템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사업단은 지방에서도 수액을 처방받아 치료할 수 있게 시스템을 만들고 전국에서 같은 치료를 받게 지침을 보급하는 것도 목표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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