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하자마자 내년 걱정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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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료 휘슬이 울리는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고생했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고, 드디어 해냈다는 벅찬 환희도 느꼈어요. 그런데 딱 20분이 지나면서 '내년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걱정이 밀려 오더군요."

이 사람, 천생 승부사다. 프로축구 성남 일화에 일곱 번째 별(K-리그 우승)을 안겨준 김학범(46) 감독 말이다. 국가대표 경력은커녕 프로에서 뛴 적도 없는 그가 수퍼스타 차범근 감독이 이끄는 수원 삼성을 챔피언결정전에서 두 차례 완벽하게 제압했다. '잡초 축구의 승리' '역시 학범슨(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에 빗댄 김 감독의 별명)'이라는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11월 29일 중앙일보 본사에서 그를 만났다.

▶분석 또 분석

장남 성훈 군이 대입 수능을 치른 11월 16일, 김 감독은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사흘 뒤에 치를 챔피언결정 1차전을 앞두고 그는 밤새도록 수원의 경기 비디오를 돌려봤다. 결론은 '수원의 미드필드를 제압하지 않으면 승산이 없다'였다. 터프하고 기동력이 좋은 김철호.손대호에게 기술이 뛰어난 이관우와 백지훈을 철저히 막도록 했다. 수원의 미드필더진은 힘 한번 못 쓰고 무너졌다.

김 감독은 "93년부터 비디오 분석을 했으니 아마 국내에서는 내가 처음 시도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디오 편집기가 없던 당시에 그는 비디오 기계 두 대를 놓고 90분 경기를 15분 내외로 압축해 선수들에게 보여줬다.

▶기다림의 미학

명지대-국민은행에서 수비수로 선수 생활을 한 김 감독은 92년 현역 은퇴한 뒤 6개월간 은행 업무를 익혔고, 국민은행 코치로 있다 98년 외환위기로 팀이 해체된 뒤 다시 7개월간 본사 근무를 했다. 그는 "축구는 인생의 축소판이다. 조직 관리, 심리 분석 등 축구와 경영은 통하는 게 많다"고 했다.

축구판으로 돌아온 그는 인사.조직 관리를 선수 지도에 접목했다. '자책골의 명수'라는 비아냥에 시달리던 조병국, 성격이 소심해 '2인자' 소리만 듣던 골키퍼 김용대, '좌 영표-우 진섭'으로 이름을 날리다 평범한 선수로 전락한 박진섭 등은 김 감독을 만나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김 감독은 "한때 잘나가다 좌절한 선수를 되살리는 건 정말 어렵다. 끈질기고 세심하게 다독여야 한다. '기다림의 미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줄담배와 에스프레소

김 감독은 특별한 취미가 없다. 술도 잘 못하고, 골프도 치지 않는다. 축구 비디오를 보면서 줄담배를 피우고, 진한 에스프레소 커피를 하루에 열 잔 이상 마시는 게 낙이다. "스트레스를 주는 대상과 맞부닥쳐 스트레스를 푼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축구로 스트레스를 받았으니 축구를 연구하면서 스트레스를 푼다는 것이다.

그는 올해 6월 명지대 대학원에서 '델파이 방법을 활용한 축구 훈련방법에 관한 내용분석'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45명의 지도자를 찾아가 설문 조사와 면접을 했다. 김 감독은 해마다 시즌이 끝나자마자 브라질.영국.독일 등 전 세계를 누비며 선진 축구 흐름을 배워 온다. 올해도 나간다.

"지금의 성공은 가족의 희생 위에 이뤄진 것이다. 나는 못난 남편에 빵점 아빠"라고 말하는 승부사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진다.

글=정영재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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