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성 펀드, 미다스의 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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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성 고려대 교수는 지금 한국 증시에서 ‘미다스의 손’을 가진 사람으로 통할 법하다. 그가 건드리는 증시의 주식은 즉각 수십%씩 뛰어오르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장하성 펀드’로 불리는 한국기업지배구조펀드(KCGF)가 두번째 투자대상으로 삼은 화성산업의 주가가 3일째 상한가다. 평소 1만3000원을 오리내리던 화성산업의 주가는 장하성 펀드가 5% 이상 주식을 사들였다고 신고한 뒤 곧바로 상한가 행진에 들어가 24일 2만2150원까지 치솟았다. 단숨에 70%나 오른 것이다.

“장하성 교수가 어떤 종목을 찍었는지 미리 알았더라면 큰 돈을 벌었을 텐데..” 투자자들은 이런 아쉬움과 함께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는 듯 그 종목을 추격 매수하기 분주하다. 내가 사기만 하면 남들이 무작정 따라사고, 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는다면 이보다 행복한 일이 있겠는가? 무엇이든 만지기만하면 황금으로 변했다는 그리스 신화 속 미다스의 손이 따로 없다.

더구나 장하성 교수가 이끄는 KIGF는 사회책임투자(SRI)펀드를 표방하고 있다. 투자대상 기업의 기업지배구조를 좋게 만들어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다. 돈도 벌고 사회에도 좋은 일을 하겠다는데 누가 마다하겠는가? 장하성 펀드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더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장하성 펀드(이하 장펀드)의 행보를 보면서 “그게 아닌데..”하는 소리가 잇따라 터저나온다.

우선 장펀드는 증시에서 유통되는 주식수가 적어 살짝 건드리기만해도 뛸 수 밖에 없는 중소형주 자산주만을 집중 공략하고 있다. SRI펀드의 투자대상이 될만한 종목이 얼마든지 많건만, 유통 물량이 많아 주가가 움직임이 무거운 종목은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

이런 행보는 과거 증시에서 주가 조작을 일삼던 투기꾼들의 행보와 엇비슷하다는 비판도 그래서 나온다. 증권 감독당국의 감시가 소홀했던 1970-80년대 국내 증시에선 주가 조작이 성행했는데, 투기꾼들은 물량이 적은 중소형주를 매집해둔 뒤 그럴듯한 호재를 퍼뜨려 개인투자자들이 따라붙도록 하고는, 주가가 폭등하면 주식을 팔아 유유히 빠져나가곤 했었다.

장펀드는 SRI펀드로 볼 수 없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SRI펀드란 무엇인가. 친환경, 사회의 약자 보호, 좋은 기업지배구조 등을 통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들을 선별해 투자하는 펀드를 말한다. 일반 펀드들이 기업의 재무적 가치만을 따져 투자하는 것과 구별된다. 국내에선 유한양행이나 포스코 같은 기업이 대표적 투자 대상으로 꼽힌다.

SRI펀드는 이런 기업들과 장기적 협력 관계를 맺고, 오래 존족하며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돕는다. 투자 기업들의 지배구조를 따지는데 있어서도 주주의 이익 뿐아니라 근로자와 지역사회, 소비자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중시한다.

그러다 보면 펀드의 수익률이 처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미국이나 유럽의 SRF펀드들을 보면 투자 성과가 일반 펀드들보다 오히려 우수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들은 그 제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평가도 좋아 장기 안정적인 수익을 올리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펀드는 투자자들의 동의 아래 운용수익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함으로써 스스로도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

장펀드를 이런 요건들에 대입시켜 보자. 먼저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목표로 내세웠지만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선택한 길이 이상하다. SRI펀드는 지배구조를 고칠 의지가 있지만 그 방법을 잘 모르는 기업들에 투자해 좋은 지배구조를 갖추도록 이끌어주는데 비해, 장펀드는 지배구조가 나쁜 기업을 공격해 지배구조를 고치라고 다그치는 방식을 주로 택하고 있다.

이런 일은 SRI펀드가 아닌 일반 사모펀드 내지 헤지펀드들에게서 흔히 나타난다. SK를 공격했던 소버린이나 KT&G를 공격 중인 칼 아이칸도 기업지배구조의 개선을 명분으로 내세운 바 있다. 그렇다면 이들도 SRI펀드라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다.

다음으로 장펀드에 돈을 넣은 투자자(거의 대부분이 외국인)는 운용 성과의 일부나마 한국 사회를 위해 쓰겠다는 뜻을 피력한 적이 없다. 단지 장 교수가 고문 수수료를 공익사업 등에 기부하겠다고 밝힌 게 전부다. 이는 어디까지나 장 교수 개인 자격의 기부일뿐 펀드의 성격과는 무관하다고 봐야한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이 펀드가 증시의 건전한 투자문화를 해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증시의 개인투자자들은 장펀드의 투자종목을 추적하는데 혈안이 돼 있다. 과연 이들이 기업지배구조 개선이란 취지에 공감해서일까. 그보다는단기 대박을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장펀드는 그 의도와는 상관없이 증시를 투기판으로 몰아가는 결과를 낳고 있다. SRI펀드라면 이런 일을 초래해선 안된다.

한국 증시도 이제 SRI펀드가 꽃필 토양이 마련된 게 사실이다. 장펀드 처럼 요란하지 않아서 그렇지, 지난해말부터 SRI펀드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아울러 보다 큰 펀드를 준비하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이들 펀드는 장펀드가 자칫 잘못돼 국내 SRI펀드 시장의 싹을 자르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조바심을 내고 있다고 한다.

현대 사회에서 ‘미다스의 손’은 큰 재능에 운까지 따라 뭐든 하는 일마다 성공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 속의 미다스는 한없는 욕심과 어리석음의 캐릭터로 묘사돼 있다.

그는 부자가 되려는 욕심에 뭐든 만지기만 하면 황금으로 둔갑시키는 능력을 신으로부터 얻었지만, 먹는 음식도 사랑하는 딸 마저도 황금으로 변해버리는 엉뚱한 현실에 직면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깊이 뉘우치고 신에게 다시 빌어 정상적인 사람으로 돌아오게 된다.

장펀드를 무작정 따라가다 피해를 본 투자자들이 벌써 속출하고 있다. 장펀드가 9월초 첫 투자대상으로 편입한 대한화섬의 경우 평소 6만원 선이던 주가가 23만원까지 3백%가까이 폭등했다가 지금은 13만원선으로 최고치 대비 반토막 정도로 떨어져 있다.

장펀드야 남들이 알기전에 충분히 싼값에 사둔 터라 여전히 1백% 이상의 수익을 올리고 있지만, 뒤늦게 쫓아 들어가 최고가 근처에서 주식을 잡은 사람들은 낭패를 보게된 것이다.

장 교수는 “투명성을 추구하지만 돈 버는게 죄인가”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장펀드는 SRI펀드란 가면을 벗고 그저 하나의 외국계 사모펀드로서 당당하게 머니게임에만 열중해 주었으면 한다. 그래야 장펀드가 사는 종목은 무조건 좋은 줄 알고 무모하게 따라붙는 불나방 같은 개인투자자들이 줄어들 것이다.

김광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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