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새로운 한국소설 '강남 리얼리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8면

요즘 소설을 따라 읽다가 흥미로운 흐름을 발견했다. 소위 '강남 사람들' 얘기가 종종 눈에 띄는 것이다. 뭐, 강남 얘기라 하여 소설이 안될 건 없다. 하나 우리네 사정을 고려한다면 꽤 의미 있는 경향으로 보인다.

왜냐면 종래의 한국소설은 대체로 '없는 사람'의 장르였기 때문이다. 한번 훑어보자. 복녀가 감자밭에서 왕 서방에게 몸을 판 것도(김동인, '감자'), 영수의 난쟁이 아버지가 벽돌공장 굴뚝에서 뛰어내린 것도(조세희,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상고생 '나'가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지하철 푸시맨이 되는 것도(박민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따지고 보면 모두 가난이 야기한, 서글프고 초라한 결과였다. 식민지 시절부터 산업화 시기를 지나 최근의 청년 백수 시대에 이르기까지, 없는 사람의 서사는 한국소설의 주요 테마였다. 한국소설의 리얼리즘 전통은 바로 여기서 잉태했다.

한데 강남 사람들 얘기라면 사정이 다르다. 없는 사람의 지지리 궁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있는 사람'이 한국소설에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단지 부정적으로 묘사됐을 뿐이다. 여기엔 까닭이 있다. 없는 사람의 시선으로, 있는 사람의 세상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한국소설에서 있는 사람은 늘 타자(他者)였다.

이 암묵적인 관습에 어깃장을 놓는 게 요즘의 '강남 소설'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조정현(33.사진)의 장편 '평균대 비행'(문학수첩)도 소위 '강남 리얼리즘'을 구현한 소설이랄 수 있겠다.

일단 소설은, 요즘 한국에서 잘 팔린다는 일본의 하이틴 소설을 연상케 한다. 성년에 막 진입하려는 주인공들의 좌충우돌 통과의례를 경쾌하게 담고 있어서이다. 여기엔 적당한 로맨스도 들어있고, 적정량의 방황도 첨부됐으며, 어른들은 모르는 또래의 문화와 알을 깨고 나오려는 나름의 아픔도 적절히 혼합돼 있다. 그러나 흔하디 흔한 성장소설과는 거리가 있다. 이를 테면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어 그러하다.

'아름이 아니라면 나는 대학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대학이 필요하지 않다. 엄마와 아버지가 대학을 좋아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유행 때문이다. 하지만 유행에 뒤지기 싫어서 그 지루한 시간을 견뎌야 한다면, 나는 차라리 촌놈이 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마로처럼 의사가 되어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지루한 시간을 견딜 생각이 없었다.'

주인공 성효신은 강남 최초의 주상복합 아파트 로얄타워 31층에 산다. 집이라기보다는 어느 병원이나 호텔의 로비 같은 80평짜리 아파트다. 부모는 룸살롱을 운영하고, 효신은 퇴학과 전학 끝에 강남 화진고 3학년에 재입학한 문제아다. 대학에 가려고 과외를 받기는 한다. 그러나 앞서 적었듯이 짝사랑하는 여대생 아름과 결혼하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주인공 효신이 끝까지 도덕적 각성을 하지 않는 데 있다. 그래서 마음에 든다. 만약에 효신이 덜컥 대학에 붙었다면, 아니 잘못을 뉘우치는 의미로 31층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했다면 소설은 예의 익숙한 또 한 권의 한국소설이 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효신은 소설 막판에도 이렇게 중얼거린다. "난 먹고살만 하니까 내던질 일은 하지 않을래."

강남 리얼리즘. 처음 불러봤는데, 제법 입에 붙는다.

손민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