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카냥 궁전|과소비 극치의 현장…남의 나라일 같지 않아 우울-고정희<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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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강히형,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한국의 가을을 그리워하며 이 글을 씁니다. 소유와 버림, 만남과 작별을 가장 겸허하게 보여주는 것이 한국의 가을이 아닐는지요. 그러나 가을이 보여주는 소유와 버림, 만남과 작별이 하나의 멍에요, 집착의 근본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재물을 축적하고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향락과 쾌락을 추구했다는 필리핀 전 대통령부인 이멜다의 말라카냥 궁전을 돌아보고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언제부턴가 사치와 부패의 대명사로 통하게 된 이멜다의 그림자가 서린 말라카냥 궁전은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 오후2시부터 한시간 동안만 관광객을 위해 문을 여는데, 사실상 반쯤은 밀폐되어 있고 반쯤 공개되는 것이라지 만 이멜다의 족적을 살피기엔 충분한 공간이었습니다.
거기서 내가 첫 번째로 느낀 것은 호화스럽다기보다 권력이 저지를 수 있는「과소비」가 어디까지인가를 가장 첨예하게 보여주는 현장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궁전의 바닥에서 벽·천장에 이르기까지 서민들은 만져보지도 못하는 필리핀 마호가니로 떡칠을 하고 어마어마한 크기로 엄청난 숫자의 도공들이 들러붙어 만들었음직한 샹들리에 불빛, 보석들로 어지러운 내실의 공간, 그리고 대형 백화점의 판매장을 방불케 하는 드레스 룸의 엄청난 옷과 구두, 우산과 선글래스들은 끝간데 없는 소유욕의 추한 모습을 확인케 했습니다.
씁쓸하고 떫은 입맛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궁전을 나오면서 저는 문득 이멜다의 과소비가 남의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며칠 전 일본인과 인도네시아인, 그리고 한국인이 모여 벌이는 토론 그룹에서도 한국의 과소비 현상이 크게 지적되었습니다. 저도 동감했습니다. 아시아에서 가난하기로 몇째 안가는 필리핀 서민들의 삶을 지켜보노라면 우리가 갈 사는 나라라는 자만심보다 먼저 우리의 과소비 현상이 불안을 자극합니다.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는 술집과 유흥가, 너무 많은 백화점과 공급이 딸리는 비싼 옷들, 너무 많은 차량과 배기가스, 너무 많은 쓰레기와 오물, 그리고 적지 않게 보이는 홍등가…, 이런 것이 서울의 인상입니다.
이곳에서 만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제우리가 잘 사는 나라라는 자긍심이 대단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우리의 목에서 자긍심의 힘을 빼고 한국의 가을 모습으로 돌아갈 때가 아닌지요. 아시아의 가난이 곧 우리의 가난임을 깨달아야 할 때가 아닌가합니다. 이멜다의 과소비망령은 말라카냥 궁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서울에 널려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연습을 한국의 가을에서 배웠으면 합니다. 그때 또다시 생명을 잉태하는 긴 겨울이 우리를 찾아올 테니까요. <마닐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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