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부동산 처분 '상경 투자' 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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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에 사는 김모(62)씨는 울산 중구의 상가빌딩을 팔아 최근 서울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 69평형을 29억원에 샀다. 그는 "돈도 안 되는 지방 부동산은 처분하고 오를 가능성이 큰 강남 아파트에 투자하는 게 낫지 않으냐"고 말했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일대 공인중개사들은 최근 두 달간 거래된 무지개.신동아.삼호아파트 20~30평형대의 20~30%가 지방 수요자들이 매입한 것이라고 전했다. 서초동 시티랜드 부동산 안시찬 사장은 "종전에는 서울에 공부하러 온 자녀용으로 전셋집을 구해주는 경우가 주류였는데 요즘 집값이 크게 오르자 투자용으로 아파트를 많이 사고 있다"고 설명했다.

◆ 투자용.자녀용 집 사재기=지방 사람들이 서울이나 수도권의 아파트를 사는 '상경(上京) 투자'가 부쩍 많아졌다. 지방 아파트값은 꿈쩍도 않는 반면 서울.수도권 아파트값은 천정부지로 뛰자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갖는 지방 사람들이 돈보따리를 들고 서울.수도권으로 몰려오고 있다.

마구 뿌려진 토지보상비도 서울과 수도권 아파트 시장을 들뜨게 하고 있다. 건설교통부에 따르면 현 정권 들어 풀린 땅 보상비는 30조원을 넘는다. 충남 연기.공주의 행정중심복합도시의 경우 지난해 12월부터 지급된 보상비가 13일 현재 전체의 85%인 2조8910억원이나 풀렸다. 연기군 L공인 관계자는 "과거에는 보상비를 받아 인근 땅을 사는 게 대부분이었으나 이제는 서울이나 수도권 아파트를 사려 한다"고 전했다.

대전 중구에 사는 하모(44)씨는 지난달 초 서울 서초구 서초동 S아파트 29평형을 전세를 끼고 6억8000만원에 샀다. 그는 "행정도시 보상비로 이 아파트를 샀다"며 "늦은 감은 있지만 서울 강남권 아파트를 사 두는 게 지방 아파트보다 투자수익이 훨씬 낫다고 주변에서 권했다"고 말했다. 아직 잔금도 치르지 않았지만 이 아파트는 한 달 새 호가가 1억원이나 올랐다.

강남권 아파트 매입에 부담을 느끼는 지방 투자자들은 경기도 용인 일대로 발길을 돌리기도 한다. 용인 신봉동 ○공인중개사사무소 관계자는 "주말에는 부산이나 대구에서 용인 일대 아파트를 사려고 오는 손님이 30% 정도는 된다"고 말했다. 새 아파트 분양 시장으로 눈을 돌리는 지방 투자자도 많다. 올 상반기 경기도 화성시 향남지구에서 미분양된 W아파트에는 부산.대구.대전 등지에서 온 지방 수요자 30여 명이 계약했다.

◆ 상대적 박탈감이 상경 투자 불러=광주광역시에 거주하는 정모(46)씨는 "서울 집값이 올라 재산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 솔직히 배 아프다"며 "이러니 여윳돈을 가진 사람들이 수도권으로 가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집값 상승률을 보면 지방 사람들이 갖는 상대적 박탈감을 읽을 수 있다. 부동산114 조사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2003년 2월 말 이후 현재(11월 10일 기준)까지 서울 강남권(강남.서초.송파구) 아파트값은 평당 1343만원(1523만원→2866만원)이나 올랐으나 부산은 71만원(383만원→454만원), 광주는 60만원 오르는 데 그쳤다.

대구의 인기 주거지역으로 꼽히는 수성구 지산동 우방아파트 43평형 매매가는 2003년 초 2억원이던 것이 지금은 2억2000만원이다. 반면 서울 강남구 대치동 우성1차아파트 45평형은 같은 기간 두 배 이상 올라 23억원을 호가한다. 특히 정부가 부동산 잡기 전방위 대책에 나선 올해엔 가격 차이가 더 벌어졌다. 서울 아파트값은 9월 이후에만 7% 이상(누적 상승률.11월 10일까지) 올랐는데 부산은 0.02%, 광주는 0.55% 오른 데 그쳤고 대구는 오히려 0.07% 떨어졌다(한국 부동산정보협회 조사).

◆ "부동산 정책 실패가 부른 결과"=대구 수성구 범물동 B아파트에 사는 함모(51)씨는 "집값 안정을 어느 정권보다 강조했던 현 정부가 오히려 서울과 지방의 집값 격차를 더 벌려놓았다"며 "모임에 나가면 누구든지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집을 사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고 말했다. 배모(50.부산 문현동)씨는 "지금 서울 강남권 아파트를 사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다"며 "그러나 지방에 아파트 한 채 달랑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서울에 투자하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부동산 컨설팅업체 RE멤버스 고종완 대표는 "인기 지역 집값에만 급급한 정책이 오히려 강남권 부동산 가치를 더 높여준 결과를 가져왔다"며 "뒤늦게 내놓는 공급대책이 수도권 집중화 현상을 가져올 우려도 있다"고 걱정했다.

황성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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