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한국 갈수록 소외될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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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에 정식으로 참여해 달라는 미국의 요청을 끝내 외면했다. 지난달 9일 북한이 핵실험을 한 뒤 미국이 한국 정부에 줄기차게 요구해온 사안이었다. 이에 대해 워싱턴은 실망감을 드러내고 있다.

정부는 이와 함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의 대북 결의(1718호) 이행 계획도 발표했다. 그러나 이것도 원론적인 입장을 다시 밝혔을 뿐 새로운 내용은 담고 있지 않다.

정부의 미온적 대응은 "고강도 압박을 통해 북한이 핵을 포기하도록 한다"는 국제 사회의 분위기와 다르다. 특히 PSI의 강화를 통해 북한의 핵무기.핵물질이 다른 나라나 테러 단체로 이전되는 것을 차단하려는 미국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어 양국 간 갈등과 마찰은 커질 것으로 보인다.

◆ PSI 참여 거부=정부의 대북 제재 계획은 박인국 외교부 외교정책실장과 이관세 통일부 정책홍보본부장이 공동으로 발표했다. 정부 부처 간 의견이 종합된 최종 결론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박 실장은 "정부는 PSI 목적과 원칙을 지지하며, 우리의 판단에 따라 참여 범위를 조절하겠다"고 밝혔다. 참여 범위를 다소 확대할 수는 있지만 미국이 요구하는 '정식 참여'는 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박 실장은 'PSI 문제에 대한 결정이 미국과 조율된 것이냐'는 질문에 "한.미 양국은 여러 상호 관심사에 대해 지속적으로 긴밀히 협의하고 있다"고만 답했다.

◆ 솜방망이 대북 제재=정부는 대북 제재 계획을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른 것과 정부가 자체적으로 결정한 것으로 나눠 발표했다. 안보리 결의에 따른 조치 중 사치품 수출 규제와 금융거래 관련 규제는 안보리 산하 대북 제재위원회에서 밝힌 구체적인 지침이 없다는 이유로 시행이 유보됐다.

정부 자체 조치에는 경공업 원자재와 쌀.비료 지원 중단, 체험학습용 금강산 관광에 대한 보조금 중단, 개성공단 북한 근로자에게 임금을 직접 지급하는 정책 추진, 개성공단 추가 분양 유보 등이 포함됐다. 이 중 쌀.비료 지원 중단과 개성공단 분양 유보는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 이후 시행된 것이다. 경공업 원자재 제공 중단 역시 북한이 5월에 경의선.동해선 열차 시험운행을 일방적으로 취소함에 따라 이미 진행돼온 일이다. 금강산 관광 체험학습 지원 중단은 새로운 것이지만 제재 효과는 거의 없다.

◆ 미국 크게 실망=한국 정부의 최종 결정에 백악관과 국무부 관리들은 크게 실망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행정부의 한 관리는 "PSI로 인해 북한과 무력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면서 "그런데도 '한반도에서 전쟁만큼은 일어나선 안 된다'고 강변하는 한국의 태도가 문제다. 이로 인해 한국이 갈수록 소외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딕 체니 부통령의 국가안보 부보좌관을 지낸 애런 프리드버그 프린스턴대 교수는 "서울이 계속 대북 제재를 꺼린다면 동북아의 안전은 물론 한.미 관계도 위험에 빠뜨리게 할 것"이라고 최근 한 언론 기고문에서 경고했다.

고든 플레이크 맨스필드재단 연구원은 "한국은 지난 몇 년 동안 북한의 핵무기 보유만은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정작 북한의 핵실험 뒤에도 달라진 게 없다"고 지적했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은 12일 워싱턴 포스트 기고문에서 "한국은 북핵 문제에 가장 큰 이해 당사국이면서도 가장 양면적인 태도를 보여왔다"며 "결국 북핵 해결은 미국과 중국 간 협력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서울=이상언.신은진 기자, 워싱턴=강찬호 특파원

◆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Proliferation Security Initiative)=대량살상무기(WMD)와 관련 부품의 이전을 막기 위해 미국이 주도해 만든 국제 협력 체계. 대량살상무기를 실은 것으로 의심되는 선박.항공기의 이동을 차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80개국이 공식 참여하고 있는데, 한국 정부는 '정식' 참여가 아닌 '참관'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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