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대첩 70돌… 유일한 생존 이우석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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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5백여 독립군이 3천 일본군 몰살/동지들의 제사상도 차리지 못하니…
『5백여명의 독립군이 3천여명의 일본군과 싸워 2천2백여명을 몰살시켰지요. 아군 피해는 50여명의 사상자에 불과했습니다.』
24일은 항일독립투쟁의 대명사인 북만주 청산리대첩 70주년 기념일­.
말할것도 없이 청산리전투는 3ㆍ1운동 이듬해인 1920년 10월 김좌진장군을 총사령관으로 한 만주 북로군정서 독립군들이 일본군을 대파,독립군사상 최대의 승리를 거둔 싸움이었다.
당시 만주주둔 일본군은 3ㆍ1운동후 본국으로부터 망명해오는 청년들이 늘어나 독립군이 강해지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10월19일 화룡현 청산리 일대의 독립군을 공격했다가 김장군 등 독립군의 반격에 밀려 3천3백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했었다.
참전자중 유일한 생존자인 이우석옹(94ㆍ광명시 광명7동 301 대성연립 라동105호)은 『동지들에게 제사상이라도 차려 놓아야 하는데…』라며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이옹은 노환에다 지난해부터 앓기 시작한 전립선 비대증으로 올해에는 24일 오후2시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청산리대첩 기념식에 참석조차 못해 먼저 눈을 감은 동지들에게 큰 죄를 지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옹의 젊은시절은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을 빼고는 얘기할수 없다.
1905년 고향인 충북 음성에서 서당을 다니던 그는 어느날 훈장선생님의 대성통곡을 듣는다. 그때 나이 9세.
철이 들면서 그는 스승의 통곡이 을사보호조약의 분함을 삭이지 못한 절규였음을 알고 「3ㆍ1운동」이 일어난 1919년 만주로 떠나 독립군에 가입했다.
철기(고 이범석장군)와 의기가 투합했던 23세때였다.
당시 독립군의 중추부대였던 북로군정서 병서운반책임을 맡고 있던 그는 20년10월 경비대 분대장으로 청산리전투에 참가,일본군을 괴멸시키는데 핵심역할을 했다.
그후 계속해서 독립군생활을 하던 그는 해방 이듬해인 46년 서울로 돌아왔으나 생계가 막막했다.
생각다 못한 그는 엿장수ㆍ사탕장수ㆍ장난감장수로 시장구석을 전전했고 어떤 때는 서울역에서 지게꾼을 하며 어려운 생계를 꾸려나갔다.
설상가상으로 33세때 청주에서 결혼한 부인마저 6ㆍ25가 발발하던 50년 겨울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옹은 외로움과 서글품ㆍ배고픔 속에서도 자신이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을 입밖에 낸 적이 없었다.
다만 80년 국사편찬위원이던 박영석씨가 그와의 대화내용을 『한 독립군병사의 항일투쟁』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내 독립운동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후 코미디언 이주일씨의 간청에 못이겨 83년 양아버지가 돼 이씨가 사준 17평짜리 연립주택에서 외와들 이강원씨(33ㆍ회사원) 부부와 함께 살고 있다.<최형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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