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총리 “회담장 밖선 잘되는데…”/남북 총리 평양회담 이모저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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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시장은 “강 총리”로 호칭/강 “차근차근 해결” 연 “속도 높여야죠”/한국 보낸 녹음테이프 중 19분 지워져
○평양냉면ㆍ날씨로 환담
▷18일 비공개회담◁
○…18일 오전 10시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2차 비공개회담에 앞서 강영훈 총리와 북측 연형묵 총리는 전날 있었던 최문선 평양시 인민위원장 주최 옥류관 만찬에서 맛본 평양냉면ㆍ날씨ㆍ첫날 회담 등을 화제로 15분간 환담했다.
양측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총리는 전날보다 다소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 대화를 나눴으나 곳곳에서 통일문제를 놓고 「차근차근」 추진해 나가자는 우리측 입장과 「속도」를 강조하는 북측 입장이부딪쳐 가벼운 신경전.
▲연=어젯밤에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강=아주 참 조용하고 방 온도도 꼭 맞게 조절해줘서 잘 잤습니다.
평양냉면 한번 먹어봐야지 했는데 역시 평양냉면 맛은 다릅디다. 잘 먹었습니다.
▲연=남쪽에서 오는 손님들은 서너그릇씩 잡숫고 하는 분이 많고 했는데.
▲강=양이 한 그릇이라고 갖다주는데 남쪽의 두 그릇은 되는 것 같습디다.
▲연=우리 그릇이 크지요.
▲강=평양인심이 좋구나 생각했습니다.
▲연=일정이 피곤하지 않게 짜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강=피곤하지도 않고 잠도 푹 잘 잤습니다. 이번에 또 오시면 어떻게 잘 대접해야 할지 걱정입니다.
▲연=홍성철 선생,어제 연회장에서 고향 옛 벗을 만났지요?
▲홍 통일원장관=그분 어렸을 때 인상이 그대로 남아 있더군요.
▲연=기억력이 참 좋습니다. 45년 되는 일인데.
▲강=그 자리서 우스갯소리로 했지만 연하사람들을 그렇게 기억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연=평양시 위원장이 연회 끝난 다음에 홍 선생이 축구하던 모습이 기억난다고 하더군요. 축구하셨어요?
▲강=원래 축구 9번 선수랍니다.
▲연=어제 학생소년궁전 그림 그리는 것 보셨지요.
▲강=천재적이더군요. 네살짜리가 그리는데 두살 때부터 그리기 시작했다고 해요. 젖먹을 때부터 그리기 시작했다는 말이지요. 옆의 여덟살난 여자아이도 명필이더군요.
▲연=그애 이름이 오은별이죠. 그 애가 여섯살 때 국제아동미술축전에 그림을 게시했는데 심사위원들이 어떻게 여섯살짜리가 이렇게 그리느냐,거짓말이다 해서 비행기로 아버지와 함께 그곳에 보내 직접 확인시키기까지 했었습니다.
▲강=우리 남쪽에도 음악천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지금 아홉살짜리가 세계 각국을 다니며 바이얼린 연주를 하고 있어요. 이런 데서 우리 한민족이 얼마나 우수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연=옛날부터 한민족이 본래 똑똑하지요.
어제 1차 회담을 했는데 서울쪽에서 어떻게 보도하고 있습니까.
▲강=잘 진행돼 간다고 보도합니다. 한 술에 배부르겠냐는 얘기가 있듯이 갑자기 다 해결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상대방의 입장과 시각을 확실히 알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는 의지가 뚜렷하다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부터 잘해갑시다.
▲연=잘합시다. 평양시에선 어떤 평이 있느냐 하면 말입니다. 북남고위급회담이라는 것이 「고위급」이 달려서 희망수준도 높을 줄 알았는데 수준이 대단히 낮다고 합니다.
▲강=교육을 어떻게 그렇게 시켰어요.(웃음)
숙소에서 일하는 아가씨가 대단히 실망했다고 얘기하더군요.
▲연=무엇 때문에 실망하는지 모르지요?
▲강=우리가 45년간 대립된 상태로 있던 것을 결합하려고 하는데 그게 하루 아침에 된다면 그건 거짓말이죠. 그건 그렇게 교육하면 안됩니다.
▲연=서울에서 올 때 큰 선물보따리를 가져와야 되는데. 우리가 갈 때는 큰 보따리를 가지고 갔었는데….
▲강=지금 우리 대표들 얼굴을 보세요. 활짝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데 이게 큰 선물이지요. 나는 연 총리를 믿는데 언제나 웃는 낯이거든. 그러면 됐다 이겁니다. 우리 둘이 언제나 웃는 낯으로 대해서 얘기할 수 있으면 일이 돼 가는거죠.
▲연=웃는 낯에 그 마음도 웃는 얼굴이어야 되죠. 고위급회담에 대한 우리 민족의 기대와 관심이 대단히 높은데 잘해 나갑시다.
▲강=남쪽도 마찬가집니다. 남쪽의 국민들은 역시 하루아침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역시 남북대표가 차근차근 이해하고 벽돌을 쌓듯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합니다.
▲연=벽돌을 쌓되 기초를 튼튼히 쌓고 올라가야되죠.
▲강=튼튼히 쌓는데 속도가 한번에 쫙 올라가지 못한다고 해서는 안되지요.
▲연=강 선생은 나이가 많이 드셨는데 속도를 높여야지요. 통일하는 것 보시고 그래야죠.
▲강=그래 좀 보게 해주십시오.(웃음)
▲연=그럼 시작해봅시다. 기자 선생님들 좀 양해를 구합시다.(기자들 퇴장 후 비공개회의 시작)
○다음 날짜 잡는 데 그칠 듯
○…18일의 2차 총리회담은 첫날 회담결과가 실망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진 때문인지 취재중인 외신기자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한 외신기자는 소련 타스통신의 기자들이 북한당국의 저지로 회담장에 들어오지 못했다고 전하고 기껏해야 이날 회담에서 양측이 다음 회담날짜를 잡는 데 그치지 않겠느냐고 비관적인 견해를 피력.
평양 주재 불가리아 대사관 2등서기관 페트코프는 그동안 남북관계를 보아 이번 회의가 열렸다는 것만도 큰 결과가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는 또 제한된 주민과의 접촉기회 때문에 북한주민의 변화를 감지하기에 어려움이 있다며 일반적인 북한의 변화에 대한 보도와 기대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서로 농담 건네며 화해
▷소년궁전 관람◁
○…회의에서 신경전을 벌였던 강 총리와 연 총리는 17일 오후 만경대 소년학생궁전 공연관람에 앞서 우리 대표단 숙소에서 잠시 환담하며 화해했다.
공연장으로 강 총리를 안내하기 위해 숙소인 백화원초대소를 찾은 연 총리는 『점심식사를 잘 하셨느냐』고 인사를 건넸고 두 총리는 거의 동시에 『회담장 밖에서 만나면 얘기가 잘 되는데…』라며 18일 비공개 회의에서 성과가 있기를 기대했다.
연 총리는 『딱딱한 책상에 앉지 말고 식탁에 앉아 회담하면 잘 될 것 같은데 어떠냐』고 조크를 건넸고 강 총리는 『함께 기차라도 타고 여행하면서 회담하면 더욱 잘 될 것』이라고 응답.
○“주택문제 91년 완전 해결”
▷17일 만찬◁
○17일 저녁 옥류관에서 최문선 평양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이 주최한 강 총리 환영만찬은 이날 낮의 회담 때 보다는 한결 누그러진 분위기.
최 위원장은 만찬인사를 통해 『평양은 현대 도시들의 큰 사회적 문제인 공해ㆍ실업ㆍ범죄ㆍ교통난 같은 것을 모르며 주택문제는 91년에 가면 완전 해결된다』고 은근히 자랑했다.
이어 강 총리는 답사를 통해 『우리는 겨레에게 더이상 실망을 주지 않는 대화,민족분단의 아픔을 덜어주는 대화,통일의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우는 대화를 꾸준히 해나가야 된다』고 강조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무너뜨리겠다는 생각이나 통일문제를 정치선전에 이용하는 태도를 버려야 하며 대결시대의 유산을 과감히 청산해야 한다』고 강조.
이날 만찬인사 서두에서 최 위원장은 『강영훈 총리 등 대표단 일행을 환영한다』고 「총리」 호칭을 썼고 강 총리에게 건배를 제의.
이에 대해 북측 관계자는 『정식회담에서는 「수석대표」로 호칭하지만 평양인민위원장 만찬에서 총리로 부르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뭐 별다른 의미가 있겠느냐』고 설명.
○회의개막 짤막하게 보도
▷북한언론 보도◁
○…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은 17일 오전 10시 뉴스를 통해 제2차 남북고위급회담 첫날 회의개막 소식을 짤막하게 보도.
북한 방송들은 이날 오전 10시 인민문화궁전에서의 첫날 회의개막 소식을 보도하면서 연형묵은 정무원 총리라고 밝히면서도 강영훈 국무총리는 수석대표로만 호칭.
○전문가에 의해 삭제된 듯
▷테이프 소동◁
○…17일 오후 판문점을 경유,우리측 방송사에 전달된 방송용 녹화테이프 8개 중 화면과 음성이 완전히 지워진 테이프 1개가 발견 돼 방송사와 정부측은 정확한 경위를 알아보고 있다.
20분짜리의 이 테이프는 겉표지에 「KBSㆍMBC기자 오디오」라고 씌어 있었으며 기자의 육성리포트와 화면이 담겨 있는 것인데 이 가운데 19분 정도의 분량이 녹화된 흔적은 있으나 모두 지워져 있었고 나머지 1분 분량은 녹화가 안된 공테이프 상태였다는 것이 KBSㆍMBC측의 설명.
문제의 테이프는 행낭편으로 이날 오후 5시20분쯤 판문점을 경유,우리측에 전달 돼 오후 7시20분쯤 남북대화사무국내 프레스센터에 도착,정부관계자가 목록과 숫자를 정리한 후 방송사측에 배포한 것.
방송사측은 『만일 행낭에 들어있던 테이프가 운송도중 복사됐다면 그 과정에서 지워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
방송사측은 부랴부랴 직통전화를 통해 평양 취재진과 통화하고서 『녹화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후 테이프를 보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설명.
그러나 정부관계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하루 2회씩 운영되는 행낭은 밀봉단계에서부터 남북 양측의 확인아래 함께 봉인하도록 되어 있어 이동 과정에서의 의도적인 삭제는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테이프 삭제의 원인은 아직 아리송.<평양=안희창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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