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14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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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제3부 남로당의 궤멸/전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평양 공산주의는 개인숭배”/상훈국장 홍증식도 “김일성에 환멸 느꼈다”
이승엽에 의해 해방일보 논설위원에서 쫓겨난 정태식이 하루는 식사를 같이하자고 자기처가로 나를 초청했다.
중앙청 지붕이 보이는 내자동 한길가 큰 한식대문에 최모라는 문패가 달린 정태식의 장인집을 찾아갔다.
넓은 대청을 지나 널찍한 장판방에 들어가니 뜻밖에 홍증식이 먼저 와있었다. 홍은 해방전 공산당시절부터 당내에서 조조라고 불려진 박헌영연배의 대선배였었다.
그는 8ㆍ15해방 직후 제일 먼저 조선인민보라는 신문을 창간했으며 「계동공산주의자 열성자회의」를 열어 박헌영으로 하여금 조선공산당을 재건,위원장이 되도록 한 배후연출자였었다. 그후 그는 평양에 가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상훈국장을 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부자집 사랑방 주인 같았고 평양에 몇년간이나 가 있었지만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는 전형적인 서울사람으로서 언변이 좋았고 박식한 사람이었다.
정태식은 가장 가까운 선배로서 홍증식을,그리고 가장 가까운 후배로서 나를 절대 알리지 않는 자기처가에 초대한 것 같았다. 세사람이 술상앞에 앉으니 자연히 친밀감을 느끼며 마음이 흐뭇해졌고 서로 마음에 있는 말을 다 털어놓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또 홍증식의 그 유창하고 시적인 서울말에 주눅이 들어 감히 나의 무뚝뚝한 시골사투리를 내놓을 수가 없어 주로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기만 했다. 홍은 자기는 공산주의를 30년간이나 해왔는데 평양에 가보고 공산주의라는 것이 장소와 사람에 따라서 그렇게도 달라질 줄은 몰랐다고 했다.
서울에서 우리가 한 공산주의는 동지애를 기틀로 했는데 평양의 공산주의는 상호불신ㆍ말살ㆍ개인숭배인데 놀랐다는 말을 몇번이나 되풀이 했다. 평양공산주의는 마르크스의 공산주의가 아니고 스탈린ㆍ모택동의 공산주의인 데 자기생각으로는 우리 조선은 스탈린이나 모택동의 공산주의가 아니라 독일ㆍ프랑스ㆍ영국 등 공산주의가 원래 발생한 유럽식 공산주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어 개인숭배가 심한 스탈린ㆍ모택동식 공산주의를 하게되면 사람들을 많이 다치게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홍은 다시 평양에 돌아가지 않고 서울에서 이대로 있든가,그렇지 않으면 어디 절간에 들어가 살았으면 싶다는 심경을 털어놓기도 했다.
1930년대초 국내에서 가장 먼저 마르크스주의를 접수,그 실현을 위해 가시밭을 걸어온 홍증식이 평양 김일성의 공산주의에 실망하는 이야기를 듣자 나는 더욱 착잡했다.
우리는 이제 망명할 곳도 없고 원조를 받을 곳도 없다. 누구 한사람 우리 시체를 묻어줄 사람도 없이 죽고마는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니 존경하는 선배들과 술잔을 들면서도 입맛이 쓰기만 했다.
이범순은 평양중앙당대표로 점령지구 서울연락소 소장으로 왔다가 인민군이 충청도와 전라도를 점령하자 노동당 대전연락소를 설치했다. 그는 소위 「남반부 해방지구 노동당총책」이었다. 그는 최후로 서울을 떠나면서 『잠깐 전선에 다녀오겠소. 앞으로 나와 곧 연락이 되도록 간부부로 옮기도록 합시다. 당분간 지위의 고하에는 구애하지 마십시오. 나와 곧 연락이 닿는 것이 필요합니다』고 했었다. 그는 얼굴이고 체격이고 수완이고 대단한 사람이었다. 30세 남짓한 청년을 남조선점령지구 당총책으로 김일성이 파견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대전으로 간 후에 유엔군의 폭격은 점점 더 심해지고 이북에서 온다는 것은 제대로 무장도 못한 40세가 넘은 농민을 끌어온 병정들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김일성이 기습적으로 도발한 6ㆍ25는 불가피한 전쟁은 아니었다. 히틀러 독일의 기습공격에 의한 소련의 조국방위전쟁과는 판이한 것이었다. 중국의 인민해방군에 의한 무력해방전쟁과도 판이한 것이었다.
유엔군 방송은 날마다 구체적으로 지명을 들어 반격에 나서 어디 어디를 회복했다고 하는데 인민군 총사령부 발표는 「적의 유생역량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는 매일 똑같은 발표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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