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이야기] 희귀병 환자 치료비 고통 국가는 왜 모른 척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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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해 숨지게 한 비운의 아버지가 있었다. 딸의 병명은 경추탈골증. 이유 없이 목뼈가 튀어나와 신경을 눌러 사지가 마비되는 희귀질환이다. 6년 동안 치료비로만 2억원이나 들었다. 택시운전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던 아버지는 빚더미에 올라섰다. 그러나 딸의 상태는 점점 나빠져 입술로 간단한 의사소통만 가능한 반(半)식물인간으로 기약없이 누워있기만 했다. 자포자기한 아버지는 인공호흡기 튜브를 딸의 목에서 뽑았다.

희귀질환자와 가족들이 받는 고통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드문 병을 앓고 있는 것도 서러운데 천문학적인 치료비도 홀로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희귀질환인 고셔병의 치료제인 세레자임은 일년 약값만 2억원을 웃돈다. 현재 보건복지부에 공식 등록된 희귀질환자만 1만여명이다. 그러나 이 중 고셔병과 근육병 등 8개 질환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희귀질환자는 건강보험 외에 정부로부터 어떤 경제적 혜택도 받지 못하고 있다.

희귀질환자의 비극적 사례가 보도될 때마다 여론은 한결같이 국가와 사회가 경제 논리가 아닌 인도적 차원에서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맞는 말이다. 돈이 없어 죽어야 한다면 이처럼 억울한 일도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국가의 의무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신약에 대한 제약회사의 특허권을 무시하고 값싼 복제약을 만들어 공급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아직도 약값 산정을 놓고 논란을 빚고 있는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이 대표적 사례다. 그러나 특허권 침해는 국제적 룰을 위반하는 것일 뿐 아니라 신약개발에 대한 동기 자체를 박탈하므로 장기적으론 희귀질환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약값에 거품이 들어갔는지 따지는 것은 옳지만 제약회사의 이윤추구 자체를 무시해선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 정답은 확연하다. 사회 구성원들이 고통을 분담하는 수밖에 없다. 방향은 세 가지다.

첫째, 의료비의 효율적 집행이다. 경추탈골증을 앓았던 딸이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음에도 2억원이나 되는 치료비를 써야 했다는 사실은 우리 의료의 낭비적 면모를 잘 보여준다. 의사는 교과서에 나와 있는 최선의 진료에 집착하기보다 환자의 경제적 사정까지 종합적으로 감안해야 할 의무가 있다. 환자는 확률적으로 좋아질 기회가 매우 적은 질환의 치료에 헛된 돈을 쓰지 않을 권리가 있다. 더 이상 치료가 무의미한 말기 환자라면 호스피스를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호스피스는 안락사가 아니다. 불필요한 낭비적 치료를 일절 중단하고 통증의 억제를 통해 품위 있는 임종을 맞이하도록 돕는 인도적 의료행위다.

둘째, 분배의 조정이다. 건강보험 재정에서 지불하는 감기 치료비는 연간 1조3천억원이나 된다. 암 치료비의 2배를 넘는다. 국내 건강보험이 감기 등 가벼운 질환을 앓는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는 여론을 의식한 탓도 크다. 감기환자가 암환자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험의 원래 취지를 생각해서라도 다수의 감기환자가 우월적으로 받는 혜택을 소수의 난치병이나 희귀질환자에게 돌아가도록 조정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정부 예산의 분배도 조정돼야 한다. 다리 하나, 도로 하나 덜 놓더라도 국민의 생명과 건강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셋째, 건강보험 재정을 늘려야 한다. 고령화와 신기술 도입 등 의료 수요가 급팽창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 국민은 소득의 24%를 교통.통신비로, 7%를 외식비로 소비하는 반면 건강보험을 위해선 소득의 4%만 쓴다. 우리 경제 규모를 감안할 때 매우 인색한 의료비 지출이 아닐 수 없다. 의사와 약사, 제약회사의 배를 불리기보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 사용된다는 전제 아래 건강보험 재정의 확충은 불가피해 보인다. 누구든 희귀질환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당신이 희귀질환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다.

홍혜걸 의학전문기자.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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