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 살짝 비틀었는데 북한선 비명"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5면

북한은 왜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묶인 북한 관련 계좌들에 목을 매고 있을까. 미국 측 조사에 따르면 현재 BDA에 묶인 돈은 2400만 달러(약 225억원). 국가 차원에서 보면 그리 크지 않은 금액이다.

그럼에도 북측 인사들은 지난해 9월 미측의 계좌 동결 조치 이후 "우리 장군님의 돈자리(북한에서는 금융계좌를 돈자리로 부름)를 건드렸다"고 반발해 왔다. 김계관 외무성 부상 등은 미측에 "우리 공화국의 해당 부문에서 BDA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선 절대 회담탁자에 나갈 수 없다고 한다"고 표명했다. 평양 권력층 내부의 강경 분위기를 전하는 발언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올 1월 중국 방문 시 비서실장인 강상춘 노동당 서기실장을 마카오에 보내 계좌 동결 사정을 알아보도록 했다. 강 실장은 당시 중국 공안에 체포되는 난감한 처지에 빠졌다.

이런 발언과 현상들은 BDA 계좌가 김 위원장을 정점으로 하는 권력 핵심부의 돈줄이기 때문이라는 게 우리 정보당국의 분석이다. 당국자는 "BDA의 50여 개 계좌에는 김 위원장의 비자금과 가족.측근에게 필요한 달러, 서기실의 운영자금 등이 들어 있다"고 귀띔했다. 미국도 당초 이 계좌들의 중요성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 국무부 관계자는 한국 정부에 "BDA 계좌 동결은 평양 측의 팔을 살짝 비트는 수준으로 시행한 것인데 북한이 예상외로 큰 비명을 질러 우리도 매우 놀랐다"고 설명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돈줄 죄기 때문에 김 위원장이 겪은 충격파는 예상외로 컸다. 2월 자신의 64회 생일에 이어 지난달 추석에도 특별배급을 주지 못했다. 사탕(설탕).돼지고기.식용유로 공급되는 특별배급은 김정일에 대한 주민들의 충성심을 유도하는 주요 수단이다. 노동당과 내각.군부 핵심간부들의 식단도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외국으로부터 고급 식료품을 사들여 직접 공급하는 노동당 재정경리부를 비롯한 관련 기관이 허리띠를 졸라맨 때문이다. 벤츠 승용차와 프랑스산 고급 와인, 스위스산 시계 같은 사치품 수입은 꿈도 꿀 수 없게 됐다.

그런 탓인지 북한은 백방으로 움직였다. 계좌 동결 직후 "화폐 위조설은 완전한 날조품"(지난해 12월 15일 관영 중앙통신 논평)이라고 주장하던 북한은 올 초 "미국의 금융제재로 부득불 현금거래를 하다 보니 위조달러가 끼어들어 온 것"(2월 28일 외무성 대변인)이라고 꼬리를 내렸다. 3월에 미국을 방문한 이근 외무성 미국국장은 "미국이 정보를 제공하면 위폐 제조자를 붙잡아 미 재무부에 통보할 수 있다"고 말할 만큼 물러섰다.

일각에서는 BDA 동결자금에 집착하는 건 미국의 추가적인 금융제재 가능성 때문이란 분석도 내놓는다. 스위스.러시아 등 해외에 예치한 김 위원장의 비자금(10억~30억 달러로 추정)의 운명을 가름할 시금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북한의 연간 국가예산이 29억3500만 달러(북한돈 4197억원을 1달러당 143원으로 환산)에 불과한 것에 비춰 보면 적지 않은 금액이다.

북한은 6자회담에 복귀하면서도 "금융제재 문제를 논의.해결할 것이란 전제하에 회담에 나가기로 했다"(1일 외무성 대변인)고 강조했다. 금융제재 문제는 이제 북핵 문제, 6자회담 진전 등과 맞물린 북.미 간의 최대 쟁점으로 부상했다.

이영종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