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13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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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3부 남로당의 궤멸/서울점령 인민군 갖은 만행/무차별 살상ㆍ재산약탈… 공산주의에 환멸느껴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지 며칠뒤였다.
이승만 정권에 협력한 사람은 모조리 체포하고 있었다.
나는 서대문에서 광화문 네거리쪽을 향해 무심히 걷고 있었다. 인민군이 한복을 입은 청년,또는 내복만 입은 청년 7∼8명을 골목에서 허리에 줄을 매 끌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끌려나오는 청년들이 국방군 병사인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그들 가운데 머리를 빡빡 깎은 청년들도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국방군이 한강을 건너 후퇴하지 않고 서울시내에 숨어 있었는 줄은 물랐다.
그들의 행렬을 스치고 지나가는데 내 뒤에서 콩볶는 것 같은 따발총 소리가 들렸다.
놀라 뒤를 돌아보니 그 국방군 병사들이 바로 길가 가로수밑에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인민군 병사들은 장교의 호령에 따라 행진해가고 있었다. 이 순간의 충격은 내가 그동안 믿어왔던 것에 결정적인 전환을 가져오게 했다. 인민군에 의한 통일,즉 김일성에 의한 조선통일은 절대 안된다. 무기와 군복을 버리고 민가에 숨어있는 사람을 잡아내 바로 길가에서 총살해 버리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근본적으로 내가 공산주의를 잘못 본 것 아닌가. 나의 마음은 너무나 쓰라리고 패는 것 같아 울면서 해방일보로 돌아왔다. 해방일보 논설실에 돌아오면 또 평양에서 온 논설위원들과의 논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공의 인민해방군은 상해시를 점령했을때 자본가의 집에는 손도 안대고 길거리에 천막을 치고 자고 있는 것을 미국의 사진잡지에서 본일이 있는데 북조선 인민군은 서울에 들어오자 큰집,좋은집부터 몰수하기 시작했다.
지하당시대 우리를 도와주던 동정자의 딸이 나를 찾아와 자기집을 인민군이 와서 몰수하는데 말좀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인민군은 이승만 정권에 협력하지 않고 우리에게 협력한자라 하더라도 집만 좋으면 무조건 몰수했다. 나는 분이 목까지 솟아 올랐다. 그러나 나나 정태식은 이미 권력의 지위에 있지 않았다.
나는 할 수 없이 의용군 총사령부의 유축운을 찾아갔다. 유축운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그집을 주인에게 도로 돌려주도록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후 2∼3일 소식이 없기에 무사히 해결되었는줄 알았다. 그런데그 동정자의 딸이 또 찾아왔다.
『집을 빼앗기고 길거리에 나앉았어오. 우리 아버지는 공산당놈들은 다 죽일놈들이라 하시며 어젯밤에 한강을 건너가셨어요.
저도 공산주의를 지지해 왔는데 대관절 공산주의가 무엇이에요』하며 내앞에서 우는 것이었다. 나도 이를 악물었다. 저절로 눈물이 솟아올랐다. 『동무 나를 용서해 주시오. 내가 힘이 없어 그렇게 됐소. 우리는 그동안 개노릇을 해왔소. 내가 동무보다 더 분해요』하고 겨우 그녀를 돌려보냈다. 밤에 유축운을 찾아가 봤다.
그 야무지게 생긴 유축운도 맥이 빠져 고개를 흔들며 『내가 당성이 약해 군과 당에서 쓰려는 집을 반동분자들에게 돌려주라고 했다가 도리어 코만 떼고 돌아왔소』하며 한숨을 쉬는 것이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한국화폐 가치를 북조선 돈의 8분의 1로 절하했다. 그리고 북로당원들은 월급외에 전시수당이 붙었다. 혁명하러 왔다는 자들이 무슨 전시수당인가. 남로당원에게는 전시수당이라는 것은 없었다.
그러니 같은 월급을 받아도 남로당원 두배의 월급이 되었다.
8배로 늘린 한국돈으로 인민군 군관들은 서울시내의 상점 상품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가죽구두와 가죽장화가 제일 인기가 있었다.
그 다음에는 그들 여편네의 양복ㆍ내의ㆍ양말ㆍ화장품 등이었다. 서울 시민들은 이북 거지라고 흉을 보고 있었다.
이북 거지들뿐만은 아니었다. 이승엽의 장모가 이승엽의 이불을 구해준다고 부자집 장농을 털고 다닌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안기성이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서 활동할때 얻은 함경도 태생의 과부로 그녀가 데리고온 전남편 딸을 이승엽의 후처로 보낸 것이었다.
이승엽처는 절름발이로 출세한 이승엽에게 소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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