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설치물이 왜 안 되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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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어, 고장이 났네요. 왜 이러지…."

27일 오후 서울 국제 미디어아트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는 서울시립미술관. 인터랙티브 설치물인 '모호한 시그날스케이프'(악셀 로흐 작)가 먹통이 됐다. 둥근 틀에 얼굴을 대고 눈동자를 움직이면 대형 화면에 이미지가 움직이는 작품이다. 스태프 두 명이 끙끙대며 장비를 점검했지만 허사였다. "왜 이러냐"고 묻자 "사람들이 만져서 그런 것 같다"는 모호한 답변이 나왔다.

옆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소리가 들리면 60여 개의 비디오 영상이 일제히 바뀐다는 '오직 멀리서만 볼 수 있는'(스용 작). 소리를 아무리 질러대도 영상은 그대로다. 다른 곳은 어떨까. 터치패드에 그림을 그려 대형화면에 띄우는 작품도, 나팔을 불면 화면 위 물체가 움직이는 작품도 '동작 그만' 상태다. 한 전시 공간에서 무려 네 개의 작품이 고장이 났다.

서울 국제 미디어아트 비엔날레가 다수 작품의 오작동으로 국제 비엔날레의 이미지를 구기고 있다. 올해로 4회째를 맞는 이 전시는 서울시가 주최하고 시립미술관이 기획한 대형 프로젝트다. 비엔날레의 규모로는 턱없이 적은 11억 9천만원의 예산으로 참신한 작품들을 여럿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고장이 문제였다. 27일 현재 1~3층 전시장의 작품 중 다섯 개의 작품이 작동을 멈췄다. 게다가 포크.시계침 등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움직이는 '살아있는 형상'(미첼 테란 & 제프 만 작.사진)은 17일 프리뷰 때 시연을 한 뒤 "3개월 전시 기간 동안 작동시키는 건 무리"라며 장치를 아예 꺼버렸다. 윤가혜 코디네이터는 고장 작품에 대해 "대부분 해외에 있는 작가들이라 즉각 대처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이메일로 기술적인 문제들을 주고 받고 있다"고 말했다.

관람객들은 황당해 했다. 전시장에서 만난 김현주(22.대학생) 씨는 "미디어아트는 직접 참여해 보고 느끼는 재미가 있는데 좀 실망했다. 고장난 게 한두 개라면 이해가 가지만 이건 해도 너무하는 것 같다"며 씁쓸해했다.

인간이 하는 일이기에 오작동이 생길 수 있다. 설치물을 함부로 다룬 일부 관람객에게도 책임이 있다. 문제는 이들 작품이 고장난채로 방치되고 있다는 점이다. 관람객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안내문이라도 붙여야 하는 게 국제 규모 전시의 자세가 아닌가.

미디어아트는 요즘 한창 뜨는 장르다. 관람객과 소통하는 '살아 움직이는 캔버스'의 위력 때문이다. 그런데 이 디지털 캔버스가 정지됐다면? 그걸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주최 측에 묻고 싶다.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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