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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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주먹만한 그릇 속의 기름을 아까운 듯 조금씩 빨아먹으며 빨갛고 노랗고 하얀 불꽃을 치마처럼 둘러 입은 등잔은 우리 선조들의 온갖 한과 희망이 뒤엉켜있다.
가는 심지 위에 덕지덕지 새까맣게 둘러붙은 그을음은 마치 인간 세상사의 모든 풍상을 보는 것 같다.
그 등잔 아래에서 우리 여인네들은 사랑하는 자식과 남편의 옷을 기웠고 타는 불꽃을 지켜보며 이런저런 시름을 함께 태웠다.
그런가하면 바로 그 등잔 아래에서 우리 남정네들은 사서삼경을 읽었고 미래를 꿈꿨으며 대사를 논했다.
반만년 가까이 가난한 우리 조상들의 방안을 밝혀 주었던 등잔.
한밤중 창호지 문밖으로 등잔불에 비쳐지는 바느질하는 여인의 그림자는 그 자체가 한국의 멋이요 한 폭의 그림이다.
어쩌다가 문틈 사이로 스며든 바람에 등잔불이 흩날리면 여인의 그림자도 함께 춤을 춘다.
등잔은 자연 속에 기거하던 인간이 터를 닦아 집을 지으면서 모닥불과 횃불을 대신해 만들어낸 실내 조명기구다.
등잔의 역사가 그처럼 길기 때문에 등잔의 모양도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해졌다.
나무 기둥에서 가로로 갸우뚱 삐져 나온 작은 등잔걸이에 기름 접시를 올려놓고 그 위에 심지를 얹힌 등잔이 가장 고전적 형태다.
나무로 만든 등잔걸이들을 광명두리라 일컫는 것도 그 틀의 모양이「두」자와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접시 위에 심지를 얹히는 등잔 말고도 아예 심지 꽂음 구멍이 있고 등잔걸이에 잡아맬 끈을 잇게 한 고리를 갖춘 백자나 청자로 된 등잔도 있고 철제로 된 것도 있다.
등잔걸이의 밑판은 재떨이나 성냥·부싯돌·부젓가락 등을 놓을 수 있도록 되어있으며 세로 기둥은 여러 개의 잇 틈을 내어 등잔의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도록 했다.
제아무리 형광등이나 백혈등이 밝다고 해도 등잔처럼 우리의 깊은 가슴속까지 밝혀주지는 못하는 듯싶다.
북구 등에서는 지금도 고풍스런 고급 가정 초대 파티에는 수정등잔으로 은은한 불빛을 밝힌다고 한다.
이제 골동품 가게나 장식품 상점에 가야 볼 수 있는 등잔이지만 우리들 마음속에는 앞으로도 길이길이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이연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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