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허무주의를 깨자면…/송진혁(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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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요즘 정치처럼 인기없는 분야도 없을 것이다. 지난번 국회 날치기파동과 야당의원직 사퇴 이후 많은 사람이 정치라면 신물이 나 있고 정치인들이 신문이나 TV에 나오면 꼴도 보기 싫다고 하는 것이 지배적인 감정이 되고 있다.
정치가 아예 공해처럼 돼버려 정치가 나서면 될일도 안되고,가뜩이나 떨어지는 주가나 더 떨어뜨린다는 인식이 굳어가고 있다. 여야협상도 야권통합도 어차피 안될 것이고 정치권에서 될 일이 무엇하나 있겠느냐는 정치허무주의가 판을 친다.
국회의원들을 놀고 먹는다고 생각하여 『의원한테는 무노동 무임금원칙도 없나』하는 빈정거림이 나오고 야당의원들이 몽땅 사표를 내도 진지하게 보지 않고 『얼마후면 몇달분 세비를 목돈으로 타겠지』한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 정치는 오늘날 폐허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는 불신당하고 경멸받고 배척되고 있으며,정치인의 말을 액면대로 받아들이면 바보취급을 받게 된다. 여북하면 국민학교 어린이들 사이에 거짓말 하지마 하는 말을 『정치하지 마』라고 한다고 할까.
정치가 이런 푸대접을 받는 것은 자업자득일 수 밖에 없다. 민족대교류를 한다고 세상이 떠들썩해도,중동사태로 이렇게 야단법석이 나도 정치권이 지혜를 보태거나 교통정리를 하거나 무엇 한가지 기여하는 것이 없고,하다못해 같이 걱정하고 고민한다는 동참의 모습마저 보기 어렵다.
정국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고도 신문에 보도되는 정치라곤 기껏 「2인자 굳히기」「대권주자」 전략이요,누가 먼저 태능 선수촌을 찾느냐는 경쟁이나 벌이고 있으니 거기서 무슨 신뢰회복이 나오겠는가.
이런 폐허처럼 된 정치가 그대로 굴러가도록 방치해서 안된다는 것은 이미 국민적 합의가 아닌가 한다.
지금까지의 폐해만 해도 엄청난데 선진국진입과 통일이 걸린 90년대 중반에 들어가도록 지가 이모양으로 가다가는 그야말로 전민족적으로 천추의 한을 남길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생각할때 우리 정치는 변해야하고 하루빨리 변화를 가져오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과연 어떤 방법이 있을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1노3김 구조가 그대로 있는한 정치가 달라질 수는 없으리라는데 일치하고 있다.
현재 정치가 이 지경이 된 것도 1노3김의 리더십 부족과 그들간의 경쟁에서 빚어진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없다. 이들의 정치행태나 정치역할의 변화없이는 우리정치의 변화가 올 수 없음은 자명하다. 이들이 스스로 변화를 보일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경험은 불가능함을 말해준다.
『집권아집에서 벗어나라,당운영을 민주화하라,정치를 집권게임으로만 몰고가지 말라…』 는등 온갖 충고ㆍ훈수ㆍ경고가 쏟아져도 마이동풍일 뿐이다. 흔히 정치권에 대해 「환골탈태」하라는 충고가 많았지만 그들이 스스로 환골탈태 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1노3김 구조의 자기갱신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다른 사람에 의해 판을 바꾸는 길 뿐이다. 우리의 현대 정치사를 봐도 실세를 가진 정치지도자가 스스로의 결심으로 물러난 예가 없다. 정계구조의 변화는 5ㆍ16,5ㆍ17 등의 변칙집권세력에 의한 강압적인 정치활동금지로 밀려나거나 자연적인 세대교체로 무대에서 사라진 경우 뿐이다.
이제 다시 강압에 의한 정계개편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만큼 새인물의 등장에 의한 변화를 기대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69년 김영삼씨가 주도한 40대기수론을 기억한다. 당시 야당에는 유진오 당수를 위시해 유진산씨등 기라성같은 노장지도층이 있었지만 약관 42세의 김씨가 대통령 후보경선 출마를 선언하고 잇따라 김대중ㆍ이철승씨가 같은 선언을 하자 당의 주도권은 어느덧 40대 3인에게로 옮겨지고 자연스럽게 지도층의 세대교체가 이뤄졌었다.
지금 상황이 그때와 다르고 사람도 그때와는 다르지만 비슷한 발상의 정치도전이 나올 수 없는 것일까. 1노3김을 축으로 하는 정치가 오늘날 폐허처럼 되어있고 변화에 대한 열망이 이렇듯 높은 것을 보면 상황은 무르익었고 명분은 확실하다. 여야를 막론하고 1노3김의 차세대중에서 독자적인 후보출마 선언,당권 도전선언을 통해 정계의 4핵체제를 다핵체제로 바꿔나갈 수는 없는 것일까.
그리하여 그가 1노3김과는 다른 문법,다른 스타일로 독자적인 정치활동을 벌이고 거기에 추종세력이 형성된다면 새모습의 정계형성과 사당성ㆍ지역성을 극복할 길도 차차 열리지 않겠는가. 물론 그런 도전이 왕년의 김씨들처럼 초기에 성공을 거두지는 못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일으킨 새 바람이 정계에 변화를 일으키는 그만큼 그자신 정치적으로 성장할 길이 열릴 것임도 분명하다. 당장 뉴스의 각광과 국민적 관심대상이 될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흔히 신문지상에 잠재적인 대권주자로 꼽히는 사람들이 보도대로 정말 큰 뜻을 품고 있다면 어떤 의미에서 지금까지 그들은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치가 이 지경이 되도록 방관하고 있는 것도 잘못이고 중요고비마다 자기목소리를 내지못한채 새끼에 묶인 돌멩이처럼 1노3김에 끌려만 간 것도 잘못이다.
만약 이런 「제3의 인물」에 의한 변화마저 없이 정계가 이대로 굴러가 92년에 다시 3김 또는 양 김씨간에 지역전이 벌어진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신판 40대기수론이든 90년대 선언이든 이름이야 어떻든 정계변화의 물꼬를 트는 시도를 누군가가 할 때가 왔다. 누구라도 앞날의 우리정치를 이끌 주력인물이 되자면 이 시험을 거쳐야 할 것이다.<편집국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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