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13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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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전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3부 남로당의 궤멸/김삼룡ㆍ이주하에 사형언도/최후진술때 “전향의사”밝힌 정태식은 20년
50년 5월17일은 나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날이다.
5월17일 용산 육군본부에서 김삼룡ㆍ이주하ㆍ정태식등 남로당 지하당 최고간부들의 재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후 나는 재판결과를 자세히 알기 위해 재판을 방청했던 장병민집을 찾았다.
『김삼룡은 흰 한복을 입고 입정했어요. 바지가랑이가 5∼6㎝쯤 째져 있었어요. 김삼룡은 돌연 뒤로 돌아서면서 뒤따라 들어오는 이주하와 정태식을 보고는 무슨 말을 했어요. 세사람은 얼굴을 맞대고 고개를 끄덕거렸어요.』 맨먼저 정태식의 재판부터 시작되었다. 민간인으로서는 채항석ㆍ장병민 부부만이 방청이 허락되었다. 다음은 장병민이 본대로 나에게 말해준 것이다.
정태식을 기소한 검사는 『남로당은 폭동ㆍ방화ㆍ살인을 선동ㆍ자행한 폭력집단인데 정태식은 바로 그 폭동ㆍ방화ㆍ살인을 그들의 기관지 「해방일보」와 「노력인민」을 통해 선동한 장본인이다. 그리고 그직접 책임자다. 따라서 사형을 구형한다』고 말했다.
이에 정태식은 『지금 검사의 논고는 증거에 근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해방일보와 「노력인민」의 어디에도 남로당이 폭동ㆍ방화ㆍ살인을 하라고 쓴 대목은 없다』고 주장했다.
최후로 재판장이 언도하기전에 정에게 『현재의 심경은 어떠한가』고 발언기회를 주었다. 이것은 담당변호사인 최경진이 중간에서 노력한 것이었다.
전향의 의사를 비추어야 사형구형에서 특별히 20년 징역을 언도할수 있는 것이다. 사형 구형을 받고 재판정에서 자신의 의사와 반하여 전향을 공공연히 표명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정태식은 눈을 감고 잠깐 생각하더니 모든 것을 체념한듯 조용한 목소리로 『만일 나에게 앞으로 생명이 있다면 대한민국 안에서 대한민국의 인간으로 이 나라의 민주화와 발전을 위해 노력해볼까 합니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장병민 자신도 눈시울이 뜨거워 참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정태식은 이로써 장병민이 전힘을 다해 노력한 보람으로 사형에서 20년의 징역언도를 받게 되었다.
다음은 이주하의 차례였다. 이주하에게도 준엄한 논고가 있었다. 재판장은 이주하에게도 최후의 언도를 하기전에 『할말이 없는가』고 발언 기회를 주었다.
이주하는 해방되던 해의 연말에 북한의 원산을 떠나 서울로 왔으나 그때는 아직 독신이었다. 그후 그는 원산에서 사귀던 처녀를 46년 봄에 서울로 불러 결혼했다.
이주하가 체포되었을 때에는 두살인가 세살난 어린 아이가 있었다. 늦게 장가를 들어서 낳은 아들이라 그는 그 아이를 대단히 사랑했다. 그는 재판장에게 『할말은 많습니다. 그러나 단 한마디로 나의 심정을 표현하려면 나의 아이는 앞으로 절대로 정치가는 시키지 않겠습니다』고 했다. 이말은 자기는 모든 잘못의 책임을 지고 정치에서 손을 떼겠다는 의미 같았다. 이주하는 사형언도를 받았다.
끝으로 김삼룡의 차례였다. 김삼룡은 검사의 논고에 대하여도 한마디의 변명 발언은 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사형을 각오하고 있었다. 재판장은 김삼용에 대해서도 말할 기회를 주었다. 김은 『나는 아무 할말도 없어요. 나를 이이상 더 욕보이지 말고 처형해 주시오』하고 입을 다물었다. 김삼룡에게도 사형이 언도되었다.
장병민은 이말을 나에게 전하면서 몇번이나 눈물을 닦았다. 그녀는 『김삼룡선생이 재판정에 들어와서 체포후 처음으로 이주하선생과 정태식선생을 만난것 같아요.
그때 세 선생이 얼굴을 맞대고 고개를 끄덕끄덕한것은 김선생이 이주하선생과 정태식선생에게 「전 책임은 나혼자다 지고 죽을 것이니 동지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나가라」고 하셨기 때문이래요』하는 것이다.
남조선 혁명은 실패하고 말았다. 김삼룡은 실패의 전 책임을 지고 죽지만 그 책임은 살아있는 나의 어깨에 다지워지는 것 같았다. 박헌영의 8월테제에는 확실히 명확하게 부르좌 민주주의 혁명을 수행한다고 했는데 왜 껑충뛰어 프롤레타리아 독재혁명으로 미끄러지고 말았는가. 나는 원점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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