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수 교수의 반론을 읽고|『민족문화 대백과』의 왜색 지적|"즉흥적 비방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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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지난 7월30일자(일부 지방 31일)에 실린 「나의 제언」에 대해 「민족문화백과」편집책임자인 박성수 교수가 8월6일자(일부 지방 7일)에 반론을 제기하여 왔으므로 이에 답하고자 한다. 나의 제언은 「민족문화백과」를 좀 더 좋은 사전으로 만들어달라는 선의의 제안이었다. 그런데 박 교수는 내가 충분한 연구와 분석도 없이 즉흥적으로 원색적인 비방을 했다고 매도하고 있다. 이에 부득이 나의 제언에 대한 근거를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첫째, 농악이라는 말은 중앙대 정병호 교수가 쓴 「농악」에 보면 1936년 조선총독부가 만든 책에 처음 나온다고 되어있다. 이것이 농악이 식민문화 용어라는 명확한 근거다. 그런데 박 교수는 농악과 풍물은 다르다고 강변하고 있는데, 『한국민속학』(새문사)에서 인하대 최인학 교수는 지금도 농촌 노인들은 농악이라는 말 대신에 풍물이나 풍장이라는 말만 쓰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로써 농악이라는 왜색 용어가 없어도 우리 문화를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박 교수는 농악은 무형문화재 공식용어이기 때문에 묵수한다고 하였는데, 틀린 줄 알면서도 왜색 용어를 「한국민족문화백과」에서 묵수한다면 이는 식민문화를 대물림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 박 교수는 이리 농악을 이리풍물로 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1936년 조선총독부가 농악이라는 말을 가르쳐 주기 이전에는 이리에서 놀던 풍물에는 이름도 없었단 말인가. 아니면, 그 뒤에야 이리에서 이른바 농악이 생겨났단 말인가.
둘째. 비원이란 이름은 1904년 7월에 처음 사용됐다. 이 이름이 일제의 영향을 받았다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그 하나는 1904년 2월에 일제가 조선 정부와 맺은 한일의정서 제1조에 「한국은 시설 개선에 관한 일본의 충고를 용납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 둘은 일본 왕의 궁궐에도 금원이 있었다는 점이다. 박 교수는 금원의 본디 말이 검원일지 모른다고 하였는데. 이는 금원이 원래 중국에서 유래하여 한자문화권에서 두루 쓰인 말임을 모르는데서 나온 소치다. 금원은 궁궐에서만 쓰는 이름으로 위엄 있는 이름이다. 일제는 자기들의 왕실에서 쓰고 있는 이 이름을 조선에서 못쓰게 함으로써 한겨레의 기를 꺾으려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그들이 광화문을 헐어 버리는 등 모든 궁궐을 훼손·변조시키고 또 산의 정기를 끊는 등 우리 민족 정기를 말살시키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쓴 것에서도 증명된다.
이밖에 다른 항목에 대해서도 하나 하나 근거를 대 박 교수의 반론을 논박할 수 있으나,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민족문화백과』관계자들은 선의의 제안을 매도하려고만 하지 말고 좀더 연구·검토하여 완벽한 사전을 만들어 주기를 부탁하고 싶다. <김창진(서울 마포구 성산2동 시영아파트 11동 2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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