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규명보다 진상 은폐 느낌|일 정부 발표 한국인 강제 징용자 명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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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해방 45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일본 정부가 7일 발표한 조선인 강제 연행자 명부 조사 발표는 일본이 과연 전쟁 책임과 식민 지배에 대한 반성을 진심으로 하고 있는지 의문을 갖게 한다.
게다가 이로써 강제 징용자 확인 작업은 종결된거나 마찬가지라고 노동성이 발표하고 있어 조사 작업 자체가 사실 규명보다 오히려 진상 은폐에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조선인 강제 연행자」라는 이름의 일제하 징용자 숫자는 일본측 공식 숫자로도 66만7천6백84명이라고 이미 지난 6월6일 노동성이 발표한바 있다.
내용은 ▲탄광 31만9천명 ▲건설·토목업 10만7천명 ▲군수 공장 16만6천명 등으로 전후 미 전략 폭격기 조사단이 내무성과 후생성 통계 자료를 근거로 작성한 것이다.
한국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 조사는 1백50만∼2백만명으로까지 추정하고 있다. 축소된 것이 분명한 일본의 공식 숫자 66만7천6백84명에 비하면 이번 확인된 7만1천4백63명은 전체징용자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일본 정부가 이들 징용자의 명부 확인 작업을 시작한 것은 지난 5월25일 노태우 대통령과 동행한 최호중 외무장관이 나카야마 (중산) 외무장관에게 조사를 요청, 이에 대해 나카야마 외무장관이 협력을 약속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일본 정부는 이시하라 (석원) 관방성장관을 중심으로 명부 확인 작업을 서두르도록 각의에서 결정, 후생성·노동성 등 관계 부처가 구체적 실무 작업을 진행시켜 왔다.
전전 강제 연행 사무를 담당한 후생성 근로국의 사무를 인계 받은 노동성 직업 안정국에 조사 본부를 설치, 6월초 동국 서무과장의 이름으로 각 지방 관청에 조사 협조를 의뢰하는 공문이 발송되었다.
결국 두달 남짓의 작업 끝에 이번 조사 발표가 나왔다. 그러나 지방 관청의 비협조 등 조사 과정에서 벌써 이번 조사가 형식에 그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와 시민 그룹의 강력한 항의가 제기되기도 했다.
이번 조사를 지켜본 관계 학자들은 입을 모아 『조사가 너무 형식적이었고 기업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나카 애지현립대 교수는 『이번 조사로는 강제 연행의 실태를 알 수가 없다. 정부는 조선인·중국인을 고용한 기업에 사람 수에 따라 도항비 등을 계산, 나중에 보상금을 준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보상금을 받기 위해 각 기업체가 자신이 고용한 조선인 연행자수를 파악하는데 열심이었음은 물론이다. 강제 연행이 국책 사업이었으므로 일본 정부가 관계 자료를 진심으로 조사하면 실태가 드러날 것』이라고 말하고 일본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파헤치지 못할게 없다」는 의견을 밝히고 있다.
한 가지 의문스러운 것은 조선인보다 숫자가 적은 중국인 강제 연행자 수는 그 전모가 정부에 의해 드러나 있다는 점이다.
중국인 강제 연행자 명부는 종전 다음해인 46년2월말 외무성이 각 사업소에 제출토록 지시한 「화인 노무자 취로 전말보고」를 근거로 외무성이 작성한 「화인 노무자 취로 사정 조사 보고서」에 전부 수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총 연행자 수는 정확하게 3만8천9백35명. 성명 미상자를 빼도 3만4천2백82명분 (전체의 88·07%)의 연행자 개인 이름·출신·사망 여부·입옥 상황 등이 밝혀져 있다.
일본 정부가 강제 연행자를 조사하면서 가장 숫자가 많은 조선인을 빼고 중국인만을 조사했을리가 없다.
이는 기록이 남겨질 경우 나중에 보상의 근거 자료가 되는 등 화근이 될 것을 우려, 정부주도로 소각시켜버렸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한다.
사실 강제 연행자 명부 조사 얘기가 나온 6월초 벌써 아사히 (조일) 신문이 「조선인 강제 연행 명부, 소실 됐을 가능성 크다」는 사실을 정부 소식통의 말을 인용, 보도하고 있었다.
이 소식통은 기사 속에서 『당시는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종전 후 혼란통에 태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명부를 관리한 구내무성 관리가 점령 군(미군)에 발견될 경우 재미없다고 생각, 자료를 대량 소각했다는 얘기를 내무성 선배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고 말해 전체 명부가 이미 존재하지 않을 것으로 시사했었다.
그렇다면 각 기업체가 별도로 보관했을 기록의 존재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다.
한 일본인 시민 그룹 대표인 이케다씨가 6월15일 아사히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도 기업체에 「군 관계 공사 자료」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기업체 쪽의 협조를 바라는 제언을 하고 있다.
이케다씨는 그의 기고문에서 『강제 연행의 전모를 푸는 열쇠는 강제 연행자를 직접 고용한 기업이 쥐고 있다. 당시 건설한 댐이나 발전소 등의 규모가 대충 기록으로 남아 있고 이로부터 숫자가 유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가 더 이상 강제 연행의 실상을 밝히기를 거부하고 있는 이상 이제는 양심적인 일본 기업에 공개를 요청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도 안되면 이들 기업을 상대로 전쟁 보상을 위한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는게 이들 양심적인 일본인들의 제언이다.
지난 7월말 개봉, 동경 시내 4개 영화관에서 많은 영화팬을 모으고 있는 만화 영화 『금의 십자가』 (산전전오 감독)도 마쓰시로 대본영의 한국 징용자를 소재로 해 일본의 전쟁 책임을 반성하고 속죄하는 일본인의 또 다른 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언젠가 일본인 자신의 손으로 「역사의 진실」이 드러나기를 기대해본다. 【동경=방인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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