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꼼한 기록 습관 … '80년' 미스터리 밝혀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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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최규하 전 대통령은 회고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22일 연건동 서울대병원 빈소에서 최흥순 비서실장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그는 "많은 사람이 궁금해 하는 1979~80년 당시 역사적 일들에 대해서는 최 전 대통령이 늘 기록하시는 습관을 갖고 있으니 나중에 정리하면 나올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에 따라 최 전 대통령을 따라다니는 의문들에 관심이 새삼 쏠리고 있다. 세 가지 의문점이다.

① 왜 계엄령을 빨리 해제하지 않았나=79년 10.26 다음날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김영삼.김대중씨 등 민주화 세력은 계엄령의 조속한 해제를 촉구했다. 그러나 계엄은 풀리지 않았다. 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오히려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권력을 잡았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을 지낸 허화평씨는 "최 대통령이 계엄을 해제하려면 현실적으로 군부의 동의를 받아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을 풀면 김재규가 민간재판을 받게 되는데 그를 민주투사라고 하는 주장이 등장하는 상황에서 군부가 어떻게 계엄령 해제에 동의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설명했다. 김재규 전 정보부장은 '계엄령 확대' 이후인 5월 20일에야 대법 선고를 받았고 4일 후 사형을 당했다.

② 왜 권력 이양 일정을 길게 잡았나=60년 4.19 혁명 후 과도정부 수반을 맡은 허정씨는 내각제 헌법을 만들어 권력을 넘기는 정치 일정을 모두 4개월 안에 끝냈다. 그런데 최 대통령은 개헌→민주선거→차기 정부 수립의 일정을 1년6개월 정도로 잡았다. 게다가 이원집정부제 개헌까지 검토했다. 그래서 그는 "권력에 욕심이 있는 것 아니냐"는 시선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의전비서관을 지낸 신두순씨는 "최 대통령은 '난 심판이지 선수가 아니다'는 자세를 끝까지 견지했다"고 주장한다. 정부로서 최대한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고 여러 제도를 검토하느라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다.

신군부 측의 한 고위인사는 "외교관 출신인 최 대통령은 체면과 모양새를 중시한다. 어느 정도는 집권해 모양을 갖춘 뒤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③ 왜 침묵했나=최 전 대통령은 80년 8월 하야 이후 '위기관리정부의 비밀'에 대해 입을 연 적이 없다. 그는 5공 내내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국정자문회의의장이라는 예우를 받았다. 그 후 서거할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법정서 증언 거부도=95~96년 12.12 사건 수사.재판 때 그는 검찰과 법원의 출석 요구를 여러 차례 거부했다. 검찰이 방문 조사하려 하자 "대통령 재임 시 공적인 행위에 대해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는 건 국가 장래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거부했다. 급기야 법원은 구인장을 발부했고 그는 검사의 손에 이끌려 법정에 섰다. 그러나 최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재임 중 행한 국정행위에 대해 증언하는 선례가 없거니와 그런 나쁜 선례를 만들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선례'라는 형식보다는 자신의 입에서 나올지도 모를 '내용'의 파장을 신경 쓰고 두려워했는지 모른다. 김영삼.김대중.김종필씨의 70년대를 지켜보면서 최 전 대통령은 3김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신군부의 압력에 무력했던 자신의 부끄러운 비밀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복잡했던 '마음의 행로'를 솔직히 밝히면 나라의 혼란과 불필요한 후유증이 생길 거라고 우려했을 가능성이 있다.

김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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