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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충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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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장면 1. 라종일 주일 대사는 얼마 전 심한 감기에 걸렸다. 어떻게 알았는지 누군가 목감기에 좋다는 유자즙을 보내왔다. 발신인은 아소 다로(生太郞) 일본 외상이었다.

또 다른 일. 최근 아소 외상이 주일 대사단과 골프를 했다. 아소 외상, 라 대사, 왕이(王毅) 중국 대사, 토머스 시퍼 미국 대사가 같은 조가 됐다. 테니스가 취미인 라 대사는 골프를 잘 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날 꼴찌를 했다. 그런데 다음날 배달이 왔다. 조그마한 골프용품 선물에 뭔가 쓰여 있어 유심히 보니 '우승 상'이라고 써 있었다. 종이 뒤에는 '상기(上記)의 사람이 1등을 한 사실을 정식 확인하는 바이다"란 글이 쓰여 있고 그 밑에는 아소 외상의 사인, 그리고 도장까지 찍혀 있었다. 유머에 섬세한 배려를 섞은 우호 무드다.

#장면 2. 나카가와 쇼이치(中川昭一) 자민당 정조회장. 사석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어깨동무를 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다. 그는 지난달 집권당의 정책을 총괄 조정하는 자리에 올랐다. 그런 그가 15일 '폭탄선언'을 했다.

"무슨 수를 써도 (북한을) 박멸해야 하므로 그 선택 옵션으로서 (일본의) 핵 보유라는 논의는 필요하다. 헌법도 핵 보유를 금지하진 않는다. 핵이 있어야 공격받을 가능성이 작아진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 그는 "난 원래 핵무장 반대론자"라고 꼬리를 내렸다. 이는 그동안 지겹도록 봐온 일본 정치인들의 전법(戰法)임을 삼척동자도 다 안다. '치고 빠지기'다.

이 두 가지 장면은 오늘날 일본의 두 얼굴을 상징한다. 겉으로는 나긋하고 세심한 배려를 하면서도 물밑에선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호시탐탐 두 눈을 번득인다. '핵 보유 금지'란 굳게 닫힌 문도 계속 두드리다 보면 언젠가 열릴지 모른다. 한국이 방향 전환이 자유자재인 쾌속정이라면 일본은 항공모함이다. 쉽게 방향을 틀기는 힘들지만 한번 방향이 정해지면 무섭게 나아간다. 그게 일본의 속성이다.

3주 전 아베 총리가 국회에서 소신을 밝히는 연설을 했다. 연설 말미에 그는 갑자기 앨버트 아인슈타인(1879~1955)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는 예전에 아인슈타인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했던 '일본 예찬'을 인용했다. "일본인들은 원래 인간에게 필요한 겸허함과 검소함, 그리고 순수하고 평화로운 마음이 있다. 이런 순수한 모든 것을 잊지 말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원자폭탄 개발의 출발점이 된 공식 'E=mc2 '을 발견했고, 말년에는 핵무기 개발에 따른 죄책감으로 다양한 평화운동에 참여한 아인슈타인의 말을 굳이 아베 총리가 인용한 이유는 자명하다. "일본인은 평화적이니 걱정하지 마라"는 메시지다.

그러나 아베 총리는 알까. 아인슈타인은 일본 여행 중 누차 일본의 군국주의 흐름을 우려했다는 사실을. 게다가 그가 인용한 아인슈타인의 말은 제2차 세계대전 한참 전인 1922년의 것인 것을. 아베 총리는 잊고 있을까. 그 뒤 일본이 벌인 만주사변.중일전쟁.태평양전쟁이 아인슈타인이 기대한 겸허와 평화로움과는 거꾸로 달려갔었다는 것을.

"'비핵화 3원칙'은 반드시 지킬 것"이란 아베 총리의 호언장담은 그가 연설에선 언급하지 않았던 아인슈타인의 우려, 그리고 이후 전개된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을 충분히 가슴에 새긴 뒤에 나온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인들은 핵무장이 불안 요소를 없애기보다 긴장과 불안을 더 고조시킨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런 냉철한 마음과 평화를 지키려는 양심을 '꼭' 잊지 말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2006년 10월 아인슈타인이 만일 살아 있었다면 일본에 이렇게 충고하지 않았을까.

김현기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