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12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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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빨치산 도울 방법없어 고심/당간부들 형편 어렵고 수송로도 완전히 막혀
박헌영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별달리 지리산에 포위당해있는 이현상과 그의 빨치산부대원들을 도울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의약품이라도 수송할 수 없을까 생각했으나 정태식은 수송로가 완전히 차단된 것 같다고 했다. 이현상의 얼굴이 내 눈앞에 떠올랐다.
그의 사위인 윤한조는 나의 대학후배일 뿐 아니라 해방전 진주에서 서로 이웃에 살았기 때문에 집안끼리 잘아는 처지였다.
그때 윤은 서대문교도소에 들어가 있었고 그의 처(이현상의 딸)는 시어머니와 서울에 숨어 있었다. 이러한 관계로 나는 이현상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현상을 도와줄 아이디어를 낼수가 없었다. 남로당 지하당간부들의 가정형편은 모두 곤란했다.
그중에서도 정태식의 집사정은 더 곤란했다.
그러나 정태식의 집은 가난하지만 그의 처가는 서울의 부호 최씨 집이었다. 정태식의 처는 48년인가 차에 치여 사망하고 말았다. 정은 처의 장례식에도 경찰이 무서워 참석하지 못했다. 경찰은 장례식장에서 정태식을 체포하려고 진을 치고 있었으나 헛수고만 하고 말았다.
정의 아이들은 처가에서 돌봐주었지만 홀로 남은 그의 어머니가 문제였다.
할 수 없어 장병민의 일가에 맡겨두고 간혹 찾아가 잠깐 만나보고 오곤 했다. 그러나 정태식이 49년 봄 수도극장 근처의 아지트에서 일단 체포되었다가 탈출한 뒤부터는 위험하여 외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근 1년이나 어머니도 가서 만나보지 못하고 있었다.
12월 연말 대목이 되어 그의 어머니가 아들 얼굴을 한번 보고 싶다고 자꾸 독촉해 왔다. 그녀는 그때 나이가 77세라 걸음도 잘 못 걸을 뿐 아니라 노망기가 있었다.
어느날 밤에 내가 그날일을 다 마치고 정의 아지트로 가니 채항석부인이 정의 어머니가 자꾸 아들을 한번 만나보게 해달라고 조른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니 문득 시골에 계시는 우리어머니 생각이 났다. 우리어머니도 칠십이 가까운 노인이었다.
『어디에 계십니까. 제가 가서 업고 오겠습니다』하고 나는 채부인과 정을 보고 말을 건넸다.
『김선생(나의 가명)이 어찌…』하며 정태식은 내말에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나에게 미안해서 하는 말 같았다.
『우리 어머니도 한번 업어드리지 못했는데 대신 정선생 어머니를 한번 업어드리지요』하며 나는 선뜻 일어섰다.
나는 채부인에게 정태식의 어머니가 있는 그녀의 일가를 물어 돈암동으로 갔다.
백발이 성성하며 눈도 잘 못뜨는 빼빼 마른 할머니였다.
나의 등에 업힌 그녀는 무슨 말인지 혼자서 중얼중얼하다가 간간이 확실한 소리로 『만국의 노동자야 단결하라』고 목청을 올려 노래를 불렀다. 길가는 사람이 들을까 싶어 나는 힘을 다해 뛰었다. 동소문을 지나 동성상업학교 근처까지 오니 길가는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 여기서 한번만 부르고 사람들 있는데서는 부르지 마세요』하니 『당신은 누구요. 나는 태식이를 위해 이 노래를 부르는데 태식이는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해요』하며 훌쩍훌쩍 우는 것이었다.
정태식의 어머니를 무사히 돈암동에서 동숭동 정에게 업어다 주자 모자가 서로 껴안고 어루만지고 했다.
설이 닥쳐와 하부조직에 돈을 준비해두어야 하는데 김삼룡한테서는 돈이 나오지 않았다.
아지트주인 채항석부부에게도 얼마간 밥값을 주어야 할 것인데 큰일 났었다. 정태식은 1년전부터 당에 재정을 보조하겠다면서 그때까지 내지 않은 중앙청 모국장에게 가보라고 했다.
합동통신 기자 형인식을 시켜 날짜와 시간은 내가 정하고 장소는 저쪽에서 정하게 하여 이때껏 권태섭이나 유축운이 가도 받아오지 못한 것을 내가 가서 2백50만원을 받아와 산하 조직원에게 나누어주고 50년의 새해를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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