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보란 듯' 북한·러시아 새 밀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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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8월 북·러 정상회담차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연해주정부 영빈관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포옹하고 있다. [중앙포토]

요즘 평양엔 전에 없이 러시아 관리들의 발걸음이 늘었다. 한 북한 소식통은 16일 "최근 북한을 방문한 한국 기업인이 직접 확인한 것"이라면서 "핵실험 뒤 평양 보통강 호텔에 러시아 외무부와 국방부에서 파견된 관리 10여 명이 투숙하며 북한과 협상을 벌이고 있다"고 전했다. 이처럼 많은 러시아 정부 관리가 평양에 머무는 것은 이례적이라는 게 이 소식통의 평가다.

이런 상황은 최근 북.러가 연출하는 '신(新)밀월' 현상과 관련 있어 보인다. 러시아는 북핵 사태 해결 과정에서 그동안 중국이 해 온 북한의 충실한 '후견자' 역할을 떠맡아 가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러시아는 북 핵실험 뒤 눈에 띄게 '북한 감싸기'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러시아는 미.일이 주도하는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안에 가장 마지막까지 제동을 걸어 미국의 애를 태웠다. 결의 확정 뒤에도 "북한과의 대화와 협상" 목소리를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높이 냈다.

6자회담 러시아 수석대표인 알렉산드르 알렉세예프 외교차관은 15일 "6자회담 재개와 한반도 비핵화를 지지한다는 얘기를 북한 당국으로부터 여러 차례 들었다"고 말했다. 13~14일 평양을 방문하고 중국을 거쳐 서울에 온 뒤 밝힌 내용인데 북한의 특사 역할을 자처하는 듯한 발언이다.

북한의 "핵실험 성공 발표" 뒤 미국을 비롯한 관계국들이 성공 여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있을 당시 러시아는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는 정부 성명을 처음으로 내기도 했다. 세르게이 이바노프 국방장관 겸 부총리가 핵실험 당일인 9일과 이튿날 연이어 "북한은 실제로 핵실험을 했으며, 북한을 핵 강국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밝힌 것이다.

러시아의 북한 감싸기는 일단 북한의 '러브 콜'에 대한 화답으로 보인다. 북한은 핵실험 강행 두 시간 전 평양주재 러시아 대사에게 이 같은 계획을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맹방이라는 중국은 고작 20분 전에 통보받았다.

북한이 세계를 뒤흔들 '깜짝쇼'를 앞두고 러시아를 특별 배려한 흔적이 짙은 대목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양국의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형적인 중.러 줄타기 외교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한반도 영향력 회복 야심의 합작품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세종연구소 홍현익 수석연구위원은 "미국의 김정일 체제 붕괴 시도에 중국이 가담할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아지면서 북한이 중.러 등거리 외교에 나선 것"이라고 진단했다. 중국에만 의존하다가는 자칫 정권 붕괴를 자초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북한으로 하여금 러시아에 손을 뻗치게 했다는 해석이다. 홍 위원은 또 "러시아도 이번 북핵 위기를 한반도에서 잃어버린 영향력을 되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판단하고 친북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모스크바 극동연구소의 알렉산드르 제빈 한국학센터 소장은 "7월 미사일 발사 뒤 중국이 유엔의 대북 제재에 동참한 데 대해 북한이 몹시 실망했으며 러시아에 대한 접근을 통해 이런 불만을 표출하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북.러는 최근 경제협력 관계에서도 상당한 진전을 이룬 것으로 알려진다. 러시아 국경도시 핫산과 북한 나진을 잇는 55㎞ 구간 철도 보수 공사를 러시아 측의 자본 투자로 올해 안에 시작할 것이란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러시아 극동 지역의 잉여 전력을 북한으로 공급하는 협상도 꽤 진척된 것으로 전해진다.

유철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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