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면된다」식 벗어나자/이명현(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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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금 이 땅은 희비의 불협화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마치 고대중국의 춘추전국시대를 연상케 하는 백가쟁명의 소리들이 왁자지껄하다. 게다가 어제까지 나름대로 주인행세하며 이른바 「사회지도자들」 입네하던 사람들마저 나라야 어찌 되어가든지 제떡 챙기는 「홀로뛰기」에 광분할 따름이다.
신호등 꺼진 네거리에서 서로 먼저 가겠다고 돌진하는 차들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 거리,그 거리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강한 삶의 의지일 수도
그런가하면 바깥세상은 하루 밤사이가 무섭게 급변하고 있다. 수많은 사회이론가들의 이론들을 쓰레기통으로 집어던져 버리게 만드는 「역사의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다. 7월1일 0시에 출생한 「하나의 독일」은 그 기적들 가운데 최근의 것이다.
하기야 우리들을 선망의 눈으로 쳐다보는 밖의 시선이 없는 것도 아니다. 어제까지 소위 공산권에 속해 있던 나라들에서 우리에게 던지는 눈빛은 놀라움으로 감싸여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의 모습이 결코 초라한 것만이 아님은 분명하다.
물론 이러한 우리의 오늘을 있게 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극성이라고 나는 진단한다. 그것을 강렬한 삶에의 의지라고 불러도 좋다. 아니면 그것을 하면 된다의 저돌적인 성취동기라 표현해도 좋다. 나는 그것을 우리들의 기나긴 한의 역사의 지층에서 형성된 고밀도 에너지의 점화현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기나긴 세월동안 응축된 기가 뻗어오르는 것이라 해도 좋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난폭성과 소아의 이해만을 도모하는 몰도덕성이 그런 세계를 지배하는 또하나의 측면이다.
오늘 이 땅은 도덕성의 부재를 탄식하며 새로운 도덕의 부활을 절규한다. 무언가 우리가 이룩해 놓은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우리는 엄청난 공동의식을 절감하고 있다. 「뻥뚫린 세상」이라는 원초적 체감이 한국인들에게 편만해 있다.
○도덕적 상처남긴 극성
하늘 두려운 줄 모르고 무엇이든지 하면 되는 줄 알고 덤비는 사람들이 온 땅에 가득 차면 세상은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변하고말 뿐이다.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저돌적 극성이 판을 치는 세상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그것은 이성이 숨쉴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지금 이땅에는 극성정치꾼,극성사업가,극성종교꾼,극성학부모,그리고 수많은 극성꾼들이 우글대고 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이만하게 된 것도 어쩌면 너와 나를 가릴것 없이 우리 모두에게 자리잡고 있는 그 극성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늘 이땅에 만연되어 있는 온갖 과열현상도 저 극성의 표현이 아닐까. 한때 과열과외가 세상을 들끓게 하더니 요즈음은 과열소비가 이땅의 지축을 흔들어 놓고 있다.
폭압적 공권력의 과열이 드디어 10ㆍ26이라는 독재권력의 종말로 끝장났으나,그러고서도 역사의 진리를 터득하지 못한 깡좋은 사람들이 5공이라는 역사의 괴물을 낳아 놓았다. 그 결과는 참으로 엄청난 도덕적 상처를 이 땅에 남겨놓았다.
정치처럼 큰 교육은 없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하면 된다」는 몰도덕적 저돌성으로 무장한 한 패거리들이 정치무대위에서 보여준 한때의 쇼가 어떤 학교교육보다,어떤 종교의 설교와 설법보다 강력한 교육적 위력을 발휘했다. 그 도덕적 상처가 오늘 이땅을 공동화하고 있다.
그뿐 아니다. 오늘 이땅의 정치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이땅의 도덕적 상처를 치유하는 데 기여하기는커녕 이미 생긴 상처에 흠집을 더해놓고 있다. 유권자에게,그것도 밤이 아닌 대낮에 공언한 철석같은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하고 있으니 도대체 어디에서 도덕성의 부활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는지도 모른다. 정치가에게 도덕을 기대하는 것은 도둑고양이에게 생선을 지켜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고.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들의 혈세를 모아 좀도둑도 아닌 큰도둑에게 맡겨놓고 어떻게 밤잠을 편히 잘 수 있겠는가. 성자나 군자까지는 되지 못하더라도 보통사람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극성만으론 안된다. 삶에의 강렬한 의지는 물론 중요하다. 그리고 긍정적 사과와 적극적 행동도 필요하다. 그리고 끈기와 백절불굴의 투혼도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물가치성,수단ㆍ방법을 가리지 않는 포악성,그리고 자기 패거리밖에 모르는 천박한 소아병,이러한 저질의식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세상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열린 세상이 아니다.
○밀어붙이기 시대 지나
지난 6월18일 전후로 몇몇 일간지에 보도된 「저질대민지침서」는 아직까지도 이땅을 지배하고 있는 「저질의식」의 실상을 드러내는 하나의 증거물이다. 「대민 작전요령」 70개항,「대민 격파요령」 77개항의 저질내용을 담고있는 「행정홍보의 길잡이」라는 이 공문서는 한마디로 깡패세계의 행동지침이다. 국민을 작전과 격파의 표적으로 삼고 온갖 비열한 수단과 방법을 거침없이 동원할 것을 가르치고 있으니 말이다. 「어둠의 자식들」의 세계에서 불어오는 찬바람 소리에 경악을 느낄 뿐이다.
우리는 지금 인류역사의 대전환점에 서 있다. 몰가치적인 밀어붙이기 작전과 격파의 무술의 시대는 이미 지났다.
그러한 무술도 극성도 모두 일차원적이다. 이제 우리에게 다가오는 세계는 다차원의 세계다. 그것은 새로운 사고의 문법을 요구하는 세계다. 그것은 우리의 사고와 행동양식의 변혁을 요구한다.<서울대교수ㆍ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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