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만이라도 남을 위해 살 거예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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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비르지니 실바(오른쪽)가 13일 광주공원 '사랑의 식당'에서 노인들에게 점심 식사를 대접 하고 있다. 프리랜서 사진작가 장정필

"내가 만나는 노인들, 특히 할머니들은 모두 어렵게 사시는 분들인데 정말 잘 웃으시고 기가 죽지 않은 게 인상적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할머니들까지 용감한 것 같습니다."

광주 직업소년원이 각계의 후원을 받아 매일 노인 500~600여 명에게 점심 식사를 무료로 제공하는 광주시 남구 광주공원 '사랑의 식당'.

이곳에서 자원봉사중인 노란색 자켓 차림의 40~60대 남녀 30여명 가운데 파란 눈의 20대 초반 여성이 끼어있다. 프랑스에서 온 22살의 비르지니 실바.

그녀는 1년 2개월째 매일 오전 10시쯤 식당에 도착해 야채.생선을 다듬은 뒤 배식을 돕는다. 밀물처럼 몰려 왔던 노인들이 식사 후 썰물처럼 빠져 나간 뒤에는 부모뻘 되는 사람들과 함께 설거지를 하고 식탁과 홀.주방 청소를 한다.

며칠 전 감자를 썰다 손가락을 칼에 베였다면서도, "괜찮아요. 안 힘들어요. 재밌어요"라며 싱글벙글 거린다.

자원봉사자 진재규(63)씨는 "예쁘장한 프랑스 처녀가 구정물 속에 손 넣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게 참 대견하다"며 칭찬했다.

가톨릭 신자인 그는 지난해 대학 졸업 후 파리에 있는 한 종교단체에 해외 자원봉사를 신청했다. 프랑스와 문화의 차이가 큰 아시아 국가를 경험해 보고 싶었다. 한국을 배정받아 지난해 8월 입국했다.

"학교에 다니면서 봉사활동을 한다고는 했는데 많은 시간을 낼 수 없었어요. 제 인생 가운데 2년 만이라도 남을 위해 살아 보자는 생각에서 한국행을 결심했어요."

광주 프랑스문화원 소개로 '사랑의 식당'에서 일하게 된 그는 오후 1시쯤 식당 일이 끝나면, 또다시 불우 노인들을 찾아 나선다.

광주에 있는 외국인 수녀들을 따라, 거동조차 힘들어 집이나 병원에서 혼자 지내는 노인들에게 밑반찬과 도시락을 배달하고 청소와 빨래를 해 주는 것이다.

노인 간호도 하고, 말벗이 돼 지루한 시간도 달래준다. 입국하면서 배운 한국어 실력도 일상적인 의사 소통에 지장이 없을 정도다.

그는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한국 사람들, 특히 노인들을 보면서 내가 오히려 많이 배우고 있다"며 "이웃을 배려하는 활기찬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언어학(프랑스어)을 전공한 그는 저녁시간이면 광주 프랑스문화원에서 학생들에게 불어를 가르치고, 문화원 일과 각종 행사도 돕는다. 내년 8월 귀국할 예정인 그녀는 다국적 자원봉사를 위해 프랑스 통신대학에 등록, 영어와 언어학 공부도 하고 있다.

신세대 처녀답게 남자친구나 구체적인 수입 규모, 부모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사적인 일"이라며 대답을 피했다. 하지만 "혼자인 데다 시내 원룸에서 검소하게 살아 돈은 별로 필요없고 강사비로 충분히 해결하고 있다"고 했다.

광주 프랑스문화원의 최승은 원장은 "타국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시간과 정성을 쏟으면서 공부도 열심히 하는 인생의 목표가 뚜렷한 젊은이"라고 칭찬했다.

이해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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