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11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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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전 남로당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 대립/49년 남북노동당 강제합당/김일성 발표않고 박헌영엔 “비밀로 하라”
49년 6월29일 38이남지역에서 군사고문단 5백명만 남기고 미군은 철수를 완료했다.
때를 기다렸다는듯 김일성은 억지로 남북노동당 중앙위원회 연합회의를 개최,합당이라는 명목으로 남로당을 없애버렸다.
남북노동당이 합당해 조선노동당이 된 셈이다. 위원장에 김일성,부위원장에 박헌영이 되었다.
해방되던 해인 45년에 김일성은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장에 불과했으며 서울의 중앙위원장인 박헌영에게 『조선인민의 존경하는 지도자 박헌영선생 만세!』라는 메시지를 보냈는데 그 이듬해인 46년 7월에는 『남북이 각각 다른 정세에 있느니만큼 각각 독자적인 노동당을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이같은 주장이 자기만의 주장이 아니고 스탈린의 국제노선이라 하며 서울의 인민당 당수 여운형과 신민당 남조선특별위원회 위원장 백남운을 부추겨 남로당의 영도권을 박헌영으로부터 탈취하려했다.
박헌영으로부터 탈권하는 음모는 실패했지만 김일성은 서울의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분리,북로당을 결성해 박헌영과 동등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렇게 해놓고는 남로당이 이남에서 점점 약체화하니 이번에는 남북노동당이 합당하여 「통일적 지도」를 해야 한다며 남로당원의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강제 합당을 추진했다.
김일성이 힘으로 남로당의 지도권을 뺏은 것이었다. 그렇게해 놓고는 김일성도 전당원에게 설명하기가 어려웠던지 합당을 일체 발표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엄중히 비밀을 지키도록 했다.
남로당 지하당 최고책임자인 김삼룡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김의 측근중의 측근인 정태식이 모를리가 없었다.
6ㆍ25후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에도 정태식은 남북노동당의 합당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정과 나를 포함해 이남의 지하에 있던 남로당원들은 6ㆍ25후 당원 재등록때 이 사실을 눈치채게 되었다.
김일성이 전당대회나 중앙위원회에서 남북노동당의 합당을 정식으로 발표하지 않고 몇해후에 다만 북한의 노동당 문헌에 49년 6월에 남북노동당이 합당했다고 기술했을 뿐이다.
권태섭과 김장한이 각각 맡고 있던 기관지부와 이론진의 부책을 유축운이 함께 맡게 되었다.
그러나 유축운도 몇달 못가서 체포당하고 말았다. 유가 체포되기전에 나도 광희동 노상에서 「날치기」로 일시 체포되어 종로5가 씨앗가게로 끌려갔다. 「날치기」라는 것은 수사기관원들이 길거리에서 누군지도 모르고 수상하면 덮어놓고 잡아가는 것을 말한다.
나는 그들을 광희동 내아지트로 유인했다. 사실 아지트로 끌고 가면 안되는 일이지만 최후의 수단이었다.
『나는 장사꾼인데 내집으로 가보자! 길가에서 수상하다고 생사람 죽이지 말아요』하며 자진해서 가택수색을 당했다. 한사람은 문간에서 권총을 빼들고 한사람이 집안에 들어와서 집안을 뒤쳤다. 무엇이 나올리가 없었다.
그들은 평안도 말씨를 썼다.
『헛수고만 했으니 내가 술값이나 드리겠소』하니 그들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러면 이 집에서 절대 이사가서는 안된다』고 하고 돌아갔다. 즉시로 나는 다른 아지트로 피하고 나의 비서에게 헐값으로 그집을 팔아버리게 했다.
그리고 나서 한 2주일후 새벽에 먼저 아지트에 새로 이사온 사람이 수사기관에 잡혀가서 영문도 모른채 고문을 당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를 길거리에서 잡은 수사기관원에게 말을 들은 다른 수사기관원이 얼굴도 모르고 난줄 알고 엉뚱한 사람을 잡아다가 조사를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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