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나라에 정성은 불우이웃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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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동생ㆍ아들 조국에 바친 상이용사 이춘희씨/1ㆍ4후퇴때 중공군 포위돌파/군납업체 운영 노인돕기 나서
대한민국 해군 군번4009번,충무ㆍ화랑무공훈장에 빛나는 6ㆍ25참전상이용사이면서 동생과 아들까지 국가에 바친 순직장병 유가족,사재를 털어 설립한 군납업체의 운영수익금으로 헌신적인 불우이웃돕기 운동을 펼치는 노해병.
해방 이듬해인 46년 동생과 함께 월남,6ㆍ25의 사선을 넘으며 격동의 한세대를 살아온 국납업체 서해상사대표 이춘희씨(64ㆍ인천시 숭의3동 105)의 이력서다.
서른다섯번째 현충일을 맞은 6일. 6ㆍ25의 격전지에서 숨진 동생 병희씨(당시17세)와 군복무중 순직한 차남 재덕씨(당시 22세)의 빛바랜 영정을 쓰다듬으며 지난 세월을 회상하는 이씨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이씨의 고향은 황해도 벽성군 고산면 입석리. 고산보통학교 졸업후 집안에서 농사일을 돕던 이씨는 46년10월 동생 병희씨와 함께 월남했다.
서울역대합실ㆍ노동자합숙소 등을 전전하다 진해까지 남하,해군의 전신인 해양경비대에 동생과 함께 자원입대한 것은 48년3월.
50년 6월25일 해병대 병장으로 전선에 뛰어든 이씨는 50년8월의 통영전투ㆍ포항전투 등을 거쳐 원산ㆍ흥남까지 진격했고 1ㆍ4후퇴때는 적의 포위망을 뚫고 구사일생으로 탈출,화랑무공훈장을 가슴에 달았다.
그러나 51년5월 김포 장서지구에서 중공군24사단과 맞붙었던 격전에서 중상을 입었다.
그리고 6월쯤 입원중인 진해시립병원에서 동생의 순직통보를 받아야했다.
59년9월 해병대 상사로 전역한 이씨는 군복무 당시 결혼한 부인 김원복씨(79년 별세)와 2남3녀 등 7가족의 생계를 위해 시내버스운전사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역경은 이에 그치지않았다.
81년8월 인하대 졸업후 해군에 입대했던 차남 재덕군이 복무중 순직했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동생 병희씨에 이어 아들까지 먼저 보내는 고통을 당해야했다.
이씨가 불우전우돕기 운동을 시작한 것은 인천시가 개인택시 48대를 국가유공자에게 특별배정했던 86년3월. 당시 개인택시 면허를 얻은 이씨는 「개인택시 보훈친우회」를 결성하고 초대회장을 맡아 불우전우돕기에 나섰다.
「전쟁터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고 어렵게 사는 유가족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어야겠다는 뜻」에서 였다.
이씨는 88년7월 보훈처의 도움으로 군납허가를 받아 소규모 군납업체인 서해상사를 설립,옛 해병대 전우들과 함께 이 회사를 운영하면서 그 수익금으로 해마다 인천양로원ㆍ영락원(불우노인수용시설) 등의 노인들을 초청,효도여행을 시키는 등의 사회봉사활동을 계속하고 있다.<인천=김정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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