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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극 칼럼] 네오 콘이 확실히 달라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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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국이 이라크 파병 결정을 한 직후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21세기위원회는 우리의 파병 결정에 따른 미국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좋은 자리였다. 미국의 국제경제원(IIE)과 한국의 세계경제연구원이 공동으로 주관한 이번 회의에 미국 신보수주의(NEO CON.네오 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울포위츠 국방부 부장관을 비롯해 국무부 차관보.하원 의원 등이 주요 연사로 나왔다.

*** "이라크와 북한 해법 다르게"

워싱턴의 분위기는 확실히 달라졌다.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양국 관계에서 보이지 않게 흐르던 냉랭한 기류가 서서히 걷혀가고 있다는 느낌을 참석자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한반도를 보는 미국의 눈에 여유가 생겼다. 북한 핵, 주한미군 재배치, 이라크 문제 등에서 이제 한.미가 서로 호흡을 맞추어 함께 갈 수 있다는 신뢰감이 회복돼 가는 징후가 확연했다.

북한 핵 문제에 대한 미국 네오 콘들의 입장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벌하고 기세등등했다. 북한을 이라크와 같이 '악의 축'으로 취급하던 그들이 이제는 "이라크와 북한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라크 문제는 전쟁으로 해결했지만 북한 문제는 6자회담을 통해 "전쟁이 아니라 외교와 협상에 의한 평화적 해결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족집게 폭격'이니, '기습공격'이니 하던 말들이 서슴지 않고 나오던 지난 봄과 비교할 때 엄청난 변화다. 이제는 네오 콘 핵심들이 "북한 문제를 조급히 볼 것이 아니라 동양의 미덕처럼 인내를 갖고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도 '감축'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았다. 주한미군 재배치는 미군 전력의 보강을 위한 전략적 필요에 의한 것이고 이를 통해 주한미군의 능력은 오히려 더 향상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해군과 공군력은 오히려 더 보강될 것이며 통일 이후의 동북아 지역 안정까지 고려에 둔 조치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이라크 파병 문제를 놓고는 매우 조심스러운 자세로 접근했다. 미국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한국이 미국의 압력을 받아 파병을 결정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인 듯 싶었다. "파병 결정은 한국이 국가이익에 따라 독자적으로 했고, 충분히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원유공급을 포함한 이 지역과의 경제적.지정학적 협력, 그리고 평화를 위한 의무 이행 등 실리와 명분이 있는 일이며, 미군과 함께 작전을 함으로써 고도의 전문성을 갖춘 한국군이 추가적인 능력을 기를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이번 파병 결정으로 북핵 문제, 주한미군 문제가 어느 정도 우리 정부가 원하던 선으로 접근된 것은 사실이다. 물론 미 행정부 사람들은 우리의 파병과 이러한 문제가 직접 연계돼 있는 듯이 비춰지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이러한 연계가 없다 해도 미국 분위기가 바뀐 것은 분명하다. 우리 목덜미를 잡아 당기던 전쟁에 대한 불안은 누그러졌으며 적어도 내년 11월 미국 대선 때까지는 유예된 셈이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 정부의 파병 결정은 충분히 평가받을 만하다.

이렇게 외국을 나올 때마다 느끼는 것은 한국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 국내에서는 그렇게 엄청나고 큰 일로 치부하던 일들이 갑자기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이는 점이다. 재신임 투표가 어떻고, 좌우의 대립이 어떻고, 세대.지역 간 갈등이 어떻고 하는 복잡한 일들은 왜소해지고 한국이라는 큰 덩어리만 눈에 보인다. 한국 내부의 시시콜콜한 문제는 보이지 않고 한국이라는 큰 그림만이 보인다는 얘기다.

*** 한국 위상을 착각하는 사람들

보수니, 진보니 하는 내부의 잣대들은 다 없어지고 '한국의 총체적 위상'이라는 잣대만이 밖에서는 작동한다는 것이다. 부강하고, 민주주의가 확립되고, 나라다운 구실을 하면 모든 한국인은 대접을 받는다. 따라서 총체적으로 우리가 어느 수준에 와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끼리의 싸움보다는 우리가 전체적으로 한 차원 높아지는 일에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또 하나, 밖에 나와 보면 우리는 크고 강한 나라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저 중소 규모의 국가로, 아직 갈길이 먼, 할 일이 많은 나라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우리가 마치 큰 힘이나 있는 나라인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국제체계라는 큰 틀 안에서 우리는 작은 단위에 불과하며 따라서 제한된 힘과 영향력밖에는 없다. 이런 우리 현실을 정확히 볼 수 있는 겸손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워싱턴에서)문창극 논설위원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