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대선 후보의 공정 경쟁과 승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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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차기 대통령 선거에 나설 예비후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와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그저께 경선 출마를 선언했다. 열린우리당에서도 정동영 전 의장이 78일간의 유럽 여행을 끝내고 귀국했다.

여론을 전파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칠 추석을 앞두고 후보들의 마음은 조급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 17대 대통령 선거는 내년 12월이다. 아직 14개월이나 남았다. 당내 경선도 열린우리당은 내년 4~5월, 한나라당은 내년 6월에나 치러진다. 그런데도 벌써 대선 경쟁에 나서니 조기 과열로 치닫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5년 단임 대통령제에서 대선 기간을 1년 이상 잡으면 권력누수(레임덕)와 국정 표류 기간이 너무 길어진다. 더군다나 추석이 끝나면 다음 주에 바로 국정감사가 시작되고 곧이어 정기국회가 열리게 돼 있다. 대선에 대한 관심이 정상적인 국회 운영에까지 영향을 미쳐서는 곤란하다. 이미 각 정당에서 드러나고 있지만 대통령 후보를 쫓아다니느라 정상적인 당 활동이 이뤄지지 않는 것도 문제다. 정상적인 정책 생산과 의정 활동이 이뤄질 리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공정한 경쟁이다. 당내 경선도 대통령 선거의 연장이다. 공정하고 투명한 검증을 통해 국민의 심판을 받은 사람이 대한민국의 대표가 돼야 한다. 경쟁이 치열해지다 보면 상대 후보에게 흠집을 내서라도 이기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다. 이미 인터넷을 중심으로 경쟁 후보 진영 간에 극단적인 비방전이 벌어진 일도 있다. 일부 지지자가 벌인 일이라고 떠넘긴다고 책임을 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후보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무책임한 폭로.비방전을 막아야 한다.

중앙일보의 여론조사에서는 국민의 절반 정도가 '(한나라당 후보의) 단일화가 힘들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10월 2일자 1면) 이는 후보들이 공정 경쟁을 거부하거나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선거법상 일단 경선에 참여하면 불복이 금지돼 있으니 그 이전에 갈라선다는 뜻이다. 공정 경쟁과 승복은 민주주의의 기본 질서다. 이것을 깨는 것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그 정도의 믿음도 주지 못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국민에게 불행이다.

본인들은 '나는 경쟁과 승복을 거듭 천명해 왔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국민이 믿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조금만 불리해도 참지 않을 것이라는 식으로 말하고 다니는 측근들이 있기 때문이다. 본인들이 분명한 입장을 밝혀 국민을 편하게 하라. 그리고 오해를 불러일으킬 말을 퍼뜨리는 측근이 있다면 엄벌하라.

1987년 야권의 후보 단일화 실패로 국민적 열망을 배신하고 군부정권을 연장한 경험이 있다. 그때 단일화를 거부한 김영삼.김대중 두 야당 지도자는 온갖 구실을 내세웠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욕심이었다. 눈앞의 작은 이익보다 신뢰를 지키고, 국민을 편하게 해주는 그런 지도자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