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11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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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전 남로당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 대립/김일성 당ㆍ군ㆍ정 3권 장악/분단책임 미­이승만에 전가… 공산정권 수립
백범이 평양에 남북연석회의를 개최하자고 서한을 발송한 날 장덕수 암살사건 증인으로 나와 달라는 미군정청의 소환장이 백범에게 왔다.
한민당측에서는 송진우ㆍ장덕수 암살사건에 백범이 관계가 있지않나 하고 의심을 품고 있었다.
백범은 남북통일선거를 하면 자기가 정권을 쥔다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도 그럴만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조만식계의 북조선 민주당계나 기타 북조선 인사들이 서울에 오면 돈암장보다 경교장을 먼저 찾아가기 때문이었다.
백범은 이북동포들에게 자기의 얼굴을 꼭한번 보일 필요를 느꼈기 때문에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평양에 갔는데 김일성은 백범이 회의대표들과 충분히 인사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백범의 방북보고서를 보면 (이것은 당외비였는데 남로당 수중에 한 부 들어왔다) 아주 불만에 차 있었다.
북한에서의 김일성 시책을 다 부정적으로 보았고 긍정적으로 본 것은 「혁명가 유가족 학원을 지어 혁명가 유가족을 우대하고 있다」는 단 한가지뿐이었다.
백범은 평양행은 결과적으로 미국과 이승만에게만 타격을 주었을뿐 김일성은 오히려 덕을 보았으며 백범자신은 잃은 것만 있지 얻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백범은 심산이 믿고 있던 벽초(홍명희)는 평양연석회의에 가서는 김일성에 밀착하여 서울을 버리고 평양에 영주하기 위해 가족을 다 불러갔다.
9월에 김일성정권이 수립되자 벽초는 부수상에 등용되었다. 그는 감격해 쌍둥이딸 둘을 김일성집 가정부로 보냈다. 큰아들 기문은 과학원원사로 한글을 연구하고 둘째아들 기무는 38선을 왔다갔다 하다가 행방불명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평양에서 벽초를 만난 사람들의 얘기로는 역시 속으로는 불평불만이 가득차 서울을 그리워하고 있더란 것이었다.
5ㆍ10총선이 있은지 4일만에 김일성은 수풍발전소에서 서울로 보내는 전기를 끊고 말았다.
이어 김일성은 조국을 분단하고 단독정권을 수립했다는 전 책임을 미국과 이승만에게 둘러씌우고 해방직후부터 진행해온 자신의 독식 정부수립작업을 시작했다.
48년 2월8일에는 정식 「인민군」까지 이미 창설해 두었으니 이제는 명목적 최고인민회의 선거만 하면 다 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남조선 지역대의원의 선거를 어떻게 하는가가 문제였는데 동서고금에 유례가 없는 지하선거를 하게했다.
남조선 지하선거라는 것은 선거인을 뽑는 선거였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은 인구 5만명에 한명씩 뽑게되어 있어 남한인구 1천8백만명(이북은 1천60만명)에 3백60명의 대의원선출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남로당원과 그 동조자들이 유권자들의 도장을 받아 대의원 선거인단 1천80명을 선출했다.
가로 10㎝ㆍ세로 5㎝의 종이에 연명식으로 기명하고 도장을 받았다.
이들 선거인당중 1천2명이 8월29일 해주에 모여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3백60명을 선출했다. 이북선출 대의원은 2백12명으로 도합 5백72명이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북의 국회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의 구성인원수로 볼때에는 남로당정권에 가까웠으나 행정집행부로 볼때에는 완전히 김일성정권이었다.
각료 20명중 남로당원은 박헌영(부수상겸 외무상) 이문규(농림상) 이승엽(사법상) 허성택(노동상) 이병남(보건상) 등 5명에 불과했다.
이에 비해 김일성은 노동당중앙위원장에 군의 최고사령관을 겸한데다 수상까지 겸해 당ㆍ군ㆍ정의 3권을 쥐게 되었다.
그외 각료에 있어서는 민족보위상에 최용건,내무상에 박일우,신업상에 김책,재정상에 최창익,국가계획위원장에 정준택 등 핵심부문은 이북측이 다 장악했다.
솔직히 말해 남로당은 김일성 단독정권을 은폐해주는 들러리에 불과했다. 김일성정권 그 자체도 스탈린의 은폐물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51년 평양의 문화선전성의 구라파부장으로 취임해 보고 비로소 그러한 현실을 알게 되었다. 문화선전성은 물론 51년 그 당시까지 각성(한국의 부에 해당함)에는 소련인 고문이 앉아 있어 일일이 간섭하고 있었다.
상(장관)은 허정숙인데,실제로 문화선전성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소련고문관과 소련에서온 제1부상(차관) 기석복이었다. 그때 허정숙이 국제회의에 갔다와서 사진전람회를 하는데 기석복이 와보고 『허정숙이 사진은 다 떼라』고 고함을 지르는 것을 보고 나는 놀랐다.PN JAD
PD 19900528
PG 06
PQ 01
CP KJ
FT V
CK 01
CS B01
BL 719
TI 물가 5월중에 올목표 초과/공공요금 당분간 억제
TX ◎이부총리 수출ㆍ제조업 부양정책 “최우선”/수평 분업통해 남북한교역 확대
5월중 소비자물가상승률이 올해 연간목표(5∼7%)를 이미 넘어서 정부가 물가대책에 비상이다.
이승윤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은 28일 민자당의원 세미나에서 『5월중에는 소비자물가가 6%를 상회할 것』이라며 물가불안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고 『1ㆍ4분기중 경제성장률이 10.3%를 기록,경제가 점차 회복되고 있으나 이는 건설ㆍ서비스업의 호황에 힘입은 것이므로 앞으로는 수출과 제조업의 경제활력회복에 정책의 최우선순위를 두어나가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이부총리는 물가안정을 위해 연간 총통화공급목표(15∼19%)는 그대로 유지하되 자금이 생산부문으로 흘러가도록 특별설비자금ㆍ중소기업구조조정 자금지원ㆍ첨단산업기술향상자금조성 등 제조업의 설비투자와 수출촉진은 계속 활발히 촉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부총리는 『공공요금은 앞으로 관련기업이 당분간 적자를 감수하더라도 물가안정을 위해 계속 억제하는 한편 추경예산편성때 재정이 통화관리 역할을 분담토록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부총리는 이어 『2단계 세제개편때 근로자나 봉급생활자에 대한 세부담을 줄이고 자산소득에 대한 세부담은 늘려나가고 근로자주택난 해소에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부총리는 『남북경제교류 증진을 위해 비교우위에 의한 교역보다 수평적 분업형태로 교역확대를 꾀하고 비무장지대에 평화시를 건설,민족공동체 회복의 시범지역으로 발전시키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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