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석의 염」(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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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아키히토(명인) 일왕이 24일밤 노태우대통령을 위한 궁성만찬회에서 행한 사과발언은 결국 「통석의 염」이란 낯선 표현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에서도 별로 쓰이지 않는 사어나 다름없는 용어를 새삼 사전에서 끄집어 내 쓴 의도는 무엇일까.
우선 우리말 사전을 들춰보면 「통석」이란 말은 「몹시 애석하고 아까움」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것은 일본어 사전에서도 거의 비슷하다. 「대단히 슬프고 애석해 하는 것」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 정도다.
옥편을 찾아보면 「통」자는 「아플 통」 「상할 통」 「다칠 통」등 몸이나 마음이 아픈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제는 「석」자다. 옥편에는 「아낄 석」 「아까울 석」 「가엾을 석」,심지어는 「불쌍히 여길 석」으로 풀이하고 있다.
가령 「석별」하면 「작별을 섭섭히 여기는 것」이고 「석패」하면 「아깝게 진 것」 또는 「분하게 진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더욱 눈여겨 봐야할 것은 「통석」이란 낱말 풀이에서 한일 두 나라 사전이 똑같이 사용한 말이 있다. 「애석」이란 어휘다.
「애석」이란 무슨 뜻인가. 「슬프고 아까움」 「매우 아깝게 여김」이다. 가령 한창 일할 젊은 나이에 죽은 사람을 두고 우리는 흔히 「애석하다」는 말을 쓴다. 어딘가 동정심 같은 것을 느끼게 하는 뉘앙스가 짙게 풍기는 말이다.
물론 말이란 글자 하나 하나의 의미를 따지고 들면 전혀 다른 뜻이 될 수도 있고 또 같은 말이라도 시대와 쓰임새에 따라 다소 변질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통석의 염」에 이르면 문제가 달라진다. 거기엔 아픔과 아쉬움은 있을지언정 뉘우침은 없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그 용어를 두고 우리측은 「뼈저리게 뉘우치는 마음」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반해 오히려 일본측은 「가슴아파게 여기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는 특파원들의 현지기사 내용이다.
뼈저리느니,뉘우치니라는 우리측의 아전인수격 확대해석도 그렇지만 그 악랄한 식민지 통치에 대한 뉘우침에 그토록 인색한 일본의 진의는 어디에 있는가. 아닌말로 「통석」이란 식민지를 빼앗긴 그들의 마음 아픔을 표현하는 데는 적절할지 모르나 우리 국민의 마음을 달래기는 너무나 미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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