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없는 길(160)-내 마음의 왕국(6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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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나는 말없이 무덤가를 돌면서 잡초들을 손으로 뽑아내리면서 생각하였다. -내가 다름아닌 의친왕의 사생아를 알게 되었을 때 나는 학교도서관에 틀어박혀 수많은 자료들과 낡은 신문들을 들춰내어 의친왕과 그의 자녀들에 관한 기록들을 훓어보았소. 1958년2월3일자로 밝혀진 아버지 의친왕의 부인은 18명. 그의 아들은 16명, 딸은 12명으로알려져 있었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 알려진 숫자일 뿐 술집작부, 여승등 아버지가 닥치는대로 상대한 여인은 이보다 훨씬 더 많고 사생아로 태어난 아이들은 훨씬 더 많이 있소. 내 어머니가 그 중의 하나이고, 당신의 남편인 내가 무덤 앞에 묘비가 세워져 있은 않은가 내게 그 책임을 물을 필요는 없소. 난 아버지의 숨겨진 아들로 그의 성조차 물려받지 못한 사생아일 뿐이므로.
나는 무덤가에 난 잡초를 뜯으면서 삼십여년전 어머니와 둘이서 이 무덤가에 찾아왔던 그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머니는 나를 이 무덤 앞에 이끌고 와서 이렇게 말하였었다.
『이것이 느그 아버지 무덤이다. 이제와서 네게 한번도 말하지 아니하였던 느그 아버지에관한 모든 것을 알려주겠다. 너를 낳고 나서 오늘날까지 이날이 오기까지 내 얼마나 속썩이며 기다려왔는지 모른다. 아드님이신 그대의 나이가 어렸을 적에는 데리고와서 말한다하여도 무슨 얘기인지 잘 모르겠응께 내 그냥 참아버리고 참아버리고 하였지요. 』
어머니는 복장이 터지는지 얘기하다 말고 말을 끊고 한참을 울다가 다시 말을 잇고 감정이 북받쳐오르면 다시 말을 끊고 또 한참을 울다가 말을 잇곤 하였었다. 어머니의 눈물은 통곡이 되어 터져흐르는 눈물이 아니라 이를 악물고 참아내리는 오열과 같은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때 내게 이런 얘기들을 해준 것 같아.
무덤에 묻힌 너의 아버지는 조선왕조의 황제엿던 고종의 둘째 아드님이신 의친왕이라는 것. 자신이 의친왕을 만나 것은 열여섯의 어린 나이로서 동기 시절이었다는 것. 그때 너의 아버지는 환갑이 넘은 할아버지였었다는 것. 성은을 입어 나를 배고, 열달을 채운 후에 너를 낳자 아버지는 내게 지금 살고 있는 두채의 한옥을 하사해 주셨다는 것. 그 후로 자주 만나뵙지는 못하고 너에게 아버지의 성을 물려주고 싶어 자주 청원을 하고는 하였지만 끝내 그 소망을 이루지 모사고 너를 사생아로 만들고 말았다는 것. 그리고 나서 어머니는 울면서 이렇게 말하였던 것 같다.
『느그 아버님이신 전하께오서 돌아가셨을 적에 나는 일곱 살인가, 여덟살인가 어린 너늘 데리고 인사동궁으로 찾아갔었지. 동궁앞에는 만장이 휘날리고 온갖 꽃들이 만발하더구먼. 내가 어린 너를 데불고 빈소로 찾아간 것은 너를 아버지의 아들로 인정받고 싶어서 그런 것이였어. 왜냐하믄 너는 그 때 사생아가 되어서 호적에도 못 올라 핵교에 갈 나이면서두 취학통지가 나오지 않아서 말이여.』
최인호 이우절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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