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미국의 안전보장 받아들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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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부시 대통령이 방콕 한.미 정상회담에서 북한 안보를 다자틀 속에서 문서로 보장해줄 수 있음을 밝혔다. 미국의 북핵 정책이 유연성을 찾은 것은 다행이지만 이번 정책 변화가 한국의 파병 결정에 대한 답례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그보다는 주로 미국의 세계 전략과 국내정치 상황에 대한 고려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즉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전후 처리가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 미국 내 신보수주의 지도자들의 정치적 입지가 약화된 데다 내년 11월 대선에서 재선의 관건이 될 경제도 어려움에 처하자 북핵 문제를 조용히 다루는 것이 합리적이라 판단한 것이다. 또한 북한이 재처리 완료와 추출된 플루토늄의 핵 억지력 강화로의 용도 변경, 급기야 이의 물리적 시현(示現)을 공언하는 등 벼랑끝 전술을 강화하고 있는 데 대해, 미국은 강력 대응이 당분간은 어렵다는 인식 하에 북한과의 타협 가능성을 보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정부가 작은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을 취하기 위해 조급하게 파병이라는 막대한 희생을 치른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된다. 따라서 정부는 파병부대의 구성에 신경을 써야 한다. 미국은 정권이 규정한 국익과 함께 인권.정의.평화 등 숭고한 가치를 추구하는 나라이므로 중.장기적으로는 우리의 현명한 외교를 이해할 것이다.

그 대신 한.미관계를 바로세우기 위해 대북정책을 바로잡아야 한다. 부시 행정부 등장 이후 한.미관계가 순조롭지 못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미국의 일관된 대북 강경책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가 대북 화해.협력 정책을 지속함으로써 미국의 대북 압박 효과를 상쇄해 왔다는 점에 있다.

특히 북한은 지난 4월 베이징(北京) 3자회담을 전후해 핵 모호성 전략을 수정, 핵 보유 기정사실화 정책 쪽으로 가고 있으나 참여정부는 '북핵 불용'을 강조하면서도 '북핵'의 개념조차 정의하지 않고 있고 사실상 북한의 핵개발을 방관해 왔다. 이제 북한 스스로 공언하듯이 핵 보유를 목전에 두고 있으므로, 우리 역시 북한이 모험주의 노선을 접고 타협에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경협이라는 지렛대를 활용해야 한다. 즉 우리는 남북경협 일관성 유지 정책이 여전히 북핵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고 있는지, 아니면 북한에 도피처를 제공해 문제 해결을 방해하고 있는지를 재고할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북한 지도부는 다시 오기 어려운 이번 기회를 잡아야 한다. 이미 3자회담에서 핵 보유 가능성을 밝힌 이후 북한의 국제적 고립은 심화돼 왔다. 북한은 민족 공조를 외쳐 왔지만 핵 개발로 일본과 미국의 극우파들을 득세케 하여 결국 한민족 전체의 운명을 위태롭게 해왔음을 직시해야 한다. 특히 미국이 북한의 제안을 거부할 때 취할 경제제재 등 강압적 대북 조치들을 준비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더구나 설사 북한이 핵을 보유한다 하더라도 우방인 중국과 러시아에조차 버림받을 뿐 아니라 수개월 내에 자신보다 몇 배 강한 핵 보유국들에 의해 봉쇄돼 결국 경제적 파탄을 맞게 될 것이 자명하다.

따라서 북한은 미국이 타협 의사를 보이고 있고 한국.중국.러시아.일본이 문서를 통한 미국의 대북 안전보장을 기꺼이 보증해주려 하며, 한국과 일본은 적극적인 경제지원을 약속하고 있는 이 호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유일 초강대국 미국의 부시 행정부에 더 이상의 양보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고, 다른 나라의 인내심도 한계에 접근하고 있다.

더구나 부시의 인기가 대외 무력 개입시 상승해 왔으므로 내년 여름께 미국 국내정치 상황에 따라 대북 초강경책을 취할 수도 있다. 따라서 북한은 민족 전체의 이익을 위해 합리적으로 판단, 핵문제 해결에 양보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이로써 주변국들의 축복 속에 남북 공존과 호혜적인 경제발전을 이루어 한반도를 평화와 번영의 모범지대로 승화시키는 한편 사실상의 통일을 달성하는 데 동참해야 할 것이다.

홍현익 세종연구소 안보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