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 문제」의 먹구름/송진혁(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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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이른바 「총체적 난국」으로 표현되는 오늘의 위기적 상황이 오게된 근본적인 원인의 하나가 정치불안에 있다는 것은 누구나 지적한다. 정치가 안정되지 않는 한 사회가 안정되지 않고 정부가 일관성있는 정책추진을 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정치와 정부에 대한 신뢰가 흔들려 정부와 정치의 지도력ㆍ집행력ㆍ조정력이 떨어지고 전체사회가 중심을 잡지못하고 흔들리게 된다.
경제논리로는 그렇게까지 떨어질 이유가 없는데도 주가가 폭락을 거듭하고 「법대로」하는데도 사태에 대처하는 정부의 노력이 먹혀들지 않는 까닭도 다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다행히 주가는 다시 오르기 시작하고 메이데이도 그럭저럭 넘겨 위기감은 좀 누그러지고 있지만 위기의 원인이 되는 정치불안이 계속되는 한 어떤 위기가 언제 어떤 형태로 또 치솟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왜 정치불안이 계속되고 있는가. 여소야대의 4당시절에는 그랬다하더라도 거대의석을 가진 민자당이 출범한 후에 오히려 정치불안이 더 가중되는 까닭이 무엇인가.
민자당이 3당통합때의 「신사고」니 「구국적 결단」이니 하는 수사와는 달리 내분과 파쟁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데는 실은 구조적인 까닭이 있으며,오늘의 위기상황을 몰고온 정치불안의 원천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92년의 문제」다. 14대 총선거와 차기 정권의 향방을 결정할 92년을 어떻게 넘기느냐를 놓고 민자당 각파간에 혼란과 갈등이 벌어지고 다른 정치세력들은 의혹에 찬 눈초리로 민자당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차기정권을 놓고 모두 자신이 없던 민정ㆍ민주ㆍ공화당은 일단 통합을 하는데까지만 성공했으나 누가 어떤 방법으로 정권을 잡고 상호지분은 얼마씩 나눠갖느냐에 관해서는 아직 합의를 보지 못한 단계인 것 같다.
말하자면 동업을 시작했으면서도 동업조건은 결정하지 못한 상태가 아닌가 한다.
박철언사건이나 대권밀약설등이 나온 배경도 여기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가령 3당통합 당시에는 내각제 개헌에 대충 양해가 된 것처럼 알려졌지만 실은 아직 대통령중심제냐,내각제냐에 관해 서로 합의가 없다. 개헌을 한다면 늦어도 내년까지는 해야 하는데 개헌과 같은 국가중대사를 불과 1년을 앞두고도 하는지 않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정치가 제대로 될 리 없는 것이다.
내각제 개헌을 할 경우 현 대통령의 임기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개헌을 하더라도 93년 2월까지의 노대통령임기는 유지될 것으로 대개 보지만 그렇다면 개헌후의 노대통령은 국정을 책임진 대통령중심제의 대통령인가,명목상의 국가원수인 내각제의 대통령인가. 혹시 개헌에 따라 노대통령이 사퇴한다면 새로 임기를 시작하는 내각제헌법의 대통령으로 다시 선출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인가.
국회의원선거구는 어떻게 될까. 민자당의 중론이 중선거구제를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는데 그렇다면 14대 선거는 중선거구제로 치러질 것인가. 그리고 공천권은 누가 행사하게 되는 것인가.
92년을 둘러싸고 제기되는 이런 국가근간에 관한 문제,정치본질에 관한 문제들이 아직 아무런 해답도,힌트도 없는 채 베일에 싸여있다. 이런 기본문제들의 방향이 결정되지 않고서야 정치권이 안정될 수도 없고 정치인들이 국사에 전념할 리도 만무다.
이런 엄청난 문제들을 요리할 민자당의 각 계파들로서는 밖에서 밥이 끓든 죽이 끓든 정신을 쏟을 여유가 없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지도 모른다.
이런 92년의 문제가 결정되지 않는 한 민자당내부의 암투와 갈등은 그치지 않을 것이며,이런 거대한 국가골조의 개축작업에 소외된 야당과 원만한 여야대화나 통상적인 정책경쟁이 될 리도 없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민자당 각파가 92년 문제에 쉽게 합의할 가능성도 적어 보인다.
개헌문제만 보더라도 민정ㆍ공화계는 내각제를 지지하지만 민주계는 명시적으로 여기에 찬성한 일이 없다. 민주계의 속셈은 가능하면 대통령직선제로 대권의 기회를 노리자는 것으로 관측되지만 민정계주류는 다시는 직선제를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확고한 것 같다.
당내 다수세를 차지하고 있는 민정계로서는 낼만한 대권주자는 없지만 92년이후에도 지금만한 지분은 차지해야겠다는 생각만은 분명하다. 92년의 그림을 놓고는 3파의 생각이 다 다르지만 민정계 내부도 반드시 단합돼 있지도 않다. 그만큼 복잡한 것이다.
또 이른바 「레임 덕」 문제도 있다. 임기말에 갈수록 대통령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은 필지의 일인데 현 대통령측으로서는 그런 권위의 누수현상을 최대한 막으려 할 것이고 차기를 노리는 측으로서는 조기에 자기입장을 확보하려 할 것이다. 이 사이에 마찰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92년으로 가는 정치도정에는 정치불안과 위기의 요소가 도처에 깔려있고 이런 요소의 해결없이 정치안정은 이룩될 수 없다.
오늘날 집권세력이 위기상황을 맞아 대통령이 직접 국정일선의 지휘에 나서고 행정부가 비상체제에 들어가는등 나름대로 총력태세를 보이고 있지만 위기해소를 위한 진정한 정치안정을 이룩하자면 하루라도 빨리 92년문제를 둘러싼 「밀실의 권력다툼」을 극복해야 한다.
민자당의 각파는 빨리 자기입장을 정리해야 하며,특히 1노2김의 결심이 중요하다. 지역구를 포기하는 정도를 넘어 그야말로 나라와 역사를 생각하는 차원에서 마음을 비우는 것이 문제해결의 필수적 조건이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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